죽은 황태자 모티프 반복해 죄의식 일깨워… ‘민초들의 합창’이 백미[박찬이의 올댓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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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물결에 뒤늦게 합류했다.
적통 중의 적통인 단종이 활을 잘 다루는 것은 그가 조선 왕조의 법통을 잇는 참된 계승자라는 상징이다.
'살해당한 왕', 그것도 정당한 계승권을 지녔으나 죽음에 이른 어린 왕의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애상을 남긴다.
'왕과 사는 남자'에선 찬탈자 수양대군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오페라에서 주인공 보리스는 수양대군의 그림자를 품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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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 러 차르 ‘고두노프’
10세 황태자 살해한 의혹 소재
비탄에 잠긴 민중의 동요·함성
‘왕사남’ 백성 곡소리와 맞닿아
‘피 흔적 지울 수 없다’ 메시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물결에 뒤늦게 합류했다. 흥행 저변에는 근원적인 비극이 자리하며, 그 중심에 단종이 있다. 여기서 단종이 호랑이를 활로 쏘아 맞히는 장면은 단순히 기개를 보여 주는 장치가 아니다. 조선의 시조 태조 이성계는 전설적인 신궁(神弓)이었으며, 정조를 비롯한 역대 왕들 역시 활쏘기에 능했다. 적통 중의 적통인 단종이 활을 잘 다루는 것은 그가 조선 왕조의 법통을 잇는 참된 계승자라는 상징이다.
그러나 ‘활’은 가장 이율배반적인 도구가 된다. 정통성의 표상이었던 활줄이 왕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된 지독한 역설. ‘살해당한 왕’, 그것도 정당한 계승권을 지녔으나 죽음에 이른 어린 왕의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애상을 남긴다.
16세기 말 러시아에도 비슷한 서사가 있다. 어린 황태자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다는 의혹에 평생 시달린 한 사내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오페라 사상 가장 파괴적인 심리극 중 하나다. 바로 모데스트 무소륵스키(1839∼1881)의 ‘보리스 고두노프’다.
실존 인물 보리스 고두노프는 1598년 러시아 차르에 오른 통치자다. 이반 뇌제 사후 러시아는 대혼란기에 접어들었고, 섭정 보리스는 강력한 정치력으로 왕좌에 섰다. 그러나 당시 열 살이었던 황태자 드미트리의 의문사를 둘러싼 의혹은 그의 치세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기근과 사회 불안이 겹치자 민심은 빠르게 흉흉해졌고, “죽은 드미트리가 살아 돌아왔다”는 가짜 드미트리의 출현은 그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왕과 사는 남자’에선 찬탈자 수양대군이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오페라에서 주인공 보리스는 수양대군의 그림자를 품은 인물이다. 왕이 된 보리스를 뒤흔드는 것은 죽은 어린 황태자의 환영이다. 보리스는 망령처럼 출몰하는 죄책감과 왕관의 무게에 끊임없이 짓눌린다. 무소륵스키는 종소리를 모방한 불안정한 트리톤(Tritone) 음정을 활용해 붕괴해 가는 왕의 심연을 음향적으로 재현했다. 일명 ‘드미트리 모티프’라고 불리는 동기는 강박적으로 반복되며 보리스의 환각과 죄의식을 일깨운다.
무소륵스키는 푸시킨의 희곡을 바탕으로 대본을 직접 썼으며, 러시아 전통 민요 형식을 모방해 길게 끄는 비탄조의 선율을 곳곳에 배치했다. 이는 러시아 특유의 우울함과 그리움을 뜻하는 ‘토스카(Toska)’의 정서를 담아내며, 청자를 러시아의 웅혼한 대지로 인도한다.
백미는 이름 없는 민초들이 부르는 합창들이다. 전통적 합창이 일관된 목소리를 냈다면, 무소륵스키의 합창은 개개인의 속삭임과 논쟁이 뒤섞인 입체적인 형태를 지닌다. 이름 없는 사람들을 단순히 배경으로 치부하지 않고 각기 움직이는 생생한 실체로 묘사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군중은 이 오페라에서 배경이 아니라 동요하고 수군거리며 비탄에 잠기는 또 하나의 주연이다. 작품이 ‘민중의 오페라’라고 불리는 이유다.
합창들은 ‘왕과 사는 남자’의 인상적인 대목과도 공명한다. 유배지로 향하는 단종의 행렬 앞에서 백성들이 곡을 하고, 황해도에서 온 이들이 청령포 물결 너머로 각자 지닌 가장 귀한 것들을 던지며 목 놓아 우는 장면 말이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가 주는 의미는 명확하다. 왕권은 쟁취할 수 있으나 그로 인해 흘린 피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단종의 마지막 숨결이 닿았을 활줄처럼 보리스를 조여 왔던 양심의 가책에는 죽은 황태자의 유령처럼 반복되는 모티프가 있다. 단종과 보리스 고두노프. 가장 높은 곳에서 외롭게 스러져 간 왕들의 이야기는 권력의 엄혹한 본성과 애달픈 민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과 이미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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