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껴안는 우아한 방법…'모순'엔 '샤스 스플린'을
보들레르가 우울할 때 찾은 와인
양귀자 소설 <모순>과 '샤스 스플린'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시간,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 어둠으로 물들 때 풍겨오는 '쌉싸름한 냄새'가 있다.
양귀자 소설 『모순』에서 주인공 '안진진'의 아버지는 그것을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냄새라고 불렀다. 낮의 열기도 밤의 고요도 아닌, 그 애매한 경계에서 풍겨오는 이질적이고 쌉싸름한 기운. 소설은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이란 이질적인 향기가 겹겹이 충돌하며 쌓여갈 때, 비로소 인생이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양감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이토록 고단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모순적 블렌딩'을 가장 우아하게 담아낸 와인은 바로 '샤토 샤스 스플린'이다.

모순의 충돌이 빚어내는 양감
안진진을 둘러싼 환경은 소설 제목 그대로 모순적이다. 그녀의 어머니와 쌍둥이 이모는 결혼을 계기로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반면, 이모는 부유하고 건실한 이모부 덕분에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
다만 생명력이 넘치는 건 오히려 어머니 쪽이다. 그녀는 남편과 사고뭉치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마음 편한 날이 없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억척스러운 생명력을 뿜어낸다. 반대로 겉보기엔 완벽하나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모는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간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모를 바라보며 안진진은 깨닫는다. 인간에겐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거라고.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건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며,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인생은 행복과 불행의 총량으로 이뤄져 있다는 깨달음은 프랑스 보르도의 블렌딩 철학과 통한다. 보르도 와인은 서로 다른 성질의 포도를 섞어 단일 품종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복합미를 만들어낸다.
보르도 물리스 지역에서 생산되는 크뤼 부르주아 등급 와인인 '샤스 스플린'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블렌딩해 만든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는 떫고 단단한 탄닌이 삶의 피할 수 없는 고단함과 상처라면, 메를로의 유연한 부드러움은 그 고단함을 견디게 하는 찰나의 평온이다. 두 품종이 치열하게 충돌하고 화해하며 섞일 때 비로소 와인의 우아한 균형이 완성된다.
샤스 스플린을 입에 머금으면 탄닌이 고운 모래알처럼 촘촘하게 혀를 감싼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빚어낸 견고한 뼈대는 모순투성이의 삶을 지탱하고, 그 위를 덮은 메를로의 성숙한 밀도는 슬픔조차 삶의 한 조각으로 품어낸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 있게 입안을 꽉 채우는 이 와인의 묵직한 바디감은 인생의 부피감이 얕다고 느껴질 때, 흔들리는 마음의 빈틈을 단단하게 메워준다.

슬픔을 쫓는 건 곧 껴안는 것
샤스 스플린은 이름부터 지독하게 문학적인 와인이다. 프랑스어로 '슬픔(Spleen)을 쫓아버린다(Chasse)'는 뜻이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인 보들레르가 이 와인을 마시고 위안을 얻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만화 『신의 물방울』의 소재로 등장해 대중적인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해 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양귀자, 『모순』 (쓰다, 94~95쪽)
흑연과 담배 등 쌉싸름한 향을 품은 샤스 스플린은 아버지가 알려준 해 질 녘 슬픔의 냄새와 닮았다. 안진진은 평생 그 슬픔을 그리워하며 산다. 어쩌면 보들레르도 이 와인으로 우울을 망각한 게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함께 살아내는 법을 배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슬픔을 쫓기 위해 오히려 슬픔을 껴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해줬으면
양귀자는 작가노트에서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문장을 소중하게 음미하고 각자의 의미로 다양하게 해석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주 천천히, 행간에 숨겨진 삶의 비릿함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읽을 때 이 소설은 진가를 발휘한다.
샤스 스플린도 천천히 마셔야 하는 와인이다. 병을 열자마자 바로 마시기보다는 디캔팅을 하거나 잔에 따른 뒤 충분히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제 향을 내어준다. 와인이 산소와 충분히 교감하며 열리기를 기다리는 정적의 시간은 인생의 떫은 맛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침묵의 독서와 어울린다. 급하게 들이켜는 와인이 깊은 풍미를 허락하지 않듯, 빠르게 넘겨버리는 페이지 속에선 생의 모순이 지닌 진정한 무게를 포착할 수 없다.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 잔 속에서 뒤늦게 피어오르는 숲과 대지의 향기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가슴을 파고드는 삶의 진실과 닮아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 모순적인 액체를 입안에서 굴리면 와인도, 소설도 그리고 인생도, 오직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견뎌낸 이들에게만 가장 깊은 속살을 보여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울을 쫓는다는 건 우울이 증발한 진공 상태의 세상을 꿈꾸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우울까지도 삶의 일부로 블렌딩해, 자신만의 깊고 풍부한 향기를 완성해내는 과정에 가깝다. 슬픔과 기꺼이 손을 잡고, 모순투성이인 하루를 가장 우아하게 즐길 줄 아는 당신의 잔에 샤스 스플린을 채운다.
신연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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