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60년 역사 뒤집는다…노사정 ‘퇴직연금 대개편’ 시동
전 사업장 의무화ㆍ기금형 신규 도입
사외적립 강제…도산해도 퇴직금 보호
영세사업장 ‘유동성 폭탄’ 직격탄 우려
일시금 견제 수순…현실과 괴리 지적도

[대한경제=최지희 기자]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11일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지난 2월 노사정이 합의한 ‘퇴직연금 기능강화 공동선언’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퇴직금 제도를 퇴직연금으로 일원화하고 기업 내부에 쌓아두던 퇴직급여를 외부 금융기관에 의무 예치하는 이번 개편은 1961년 퇴직금 제도 도입 이래 60여 년 만의 구조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구 부총리는 이날 모두발언에서“노동자의 안정적 수급권을 보장하면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기금운용체계와 관리감독 방안을 구축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전 사업장 퇴직연금 도입 단계적 의무화 △기금형 퇴직연금 신규 도입 △사외적립 의무화다.
현행 30인 이하 사업장에 한정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중퇴기금)은 300인 미만으로 확대된다. 기존 계약형과 공존하되 ‘금융기관 개방형’과 ‘연합형’ 기금이라는 새 유형도 도입된다. 정부는 민관 합동 실무작업반을 지난 6일 발족해 7월까지 세부 제도안을 완성하고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연내 개정한다는 로드맵이다.
사외적립 의무화는 이해관계자별로 명암이 엇갈린다.
근로자 입장에선 회사 도산 시에도 외부 금융기관에 예치된 퇴직급여가 보호돼 임금체불 피해가 차단되는 반면 영세사업장에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퇴직충당금은 기업이 퇴직급여 지급에 대비해 회계상 내부에 쌓아두는 부채성 준비금으로, 별도 금융기관 예치 없이 장부상으로만 적립하는 구조다. 그간 중소기업들이 이를 사실상 운전자금처럼 활용해온 관행이 묵인돼 왔는데, 사외적립이 의무화되면 이 자금을 실제로 외부에 예치해야 해 유동성 경색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크다. 구 부총리는 “6월까지 사업장 실태조사에 기반해 의무화 시기를 결정하고 중소기업 부담 완화 방안도 7월까지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금융권에는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찾아온다. 퇴직연금 미도입 사업장이 의무 가입하면 430조 원 규모의 신규 적립금이 유입되는 반면, 기금형 도입으로 수수료율은 하락 압력을 받는다. 계약형 시장을 장악해온 은행ㆍ보험사엔 시장 잠식 리스크가, 증권ㆍ자산운용사엔 신규 진입 기회가 각각 열리는 구도다.
수익률 개선 기대도 크다. 계약형 퇴직연금의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은 연 2.86%로 물가 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중소기업 전용 공공 기금형인 ‘푸른씨앗’의 3년 누적 수익률은 26.98%에 달해 대조를 이룬다. 기금형이 확산되면 여러 사업장 적립금을 한데 모아 전문기관이 운용하는 규모의 경제가 실현돼 수익률 개선이 기대된다는 분석이다. 다만 기금형(3.63%)과 계약형(3.77%)의 수익률 차이가 사실상 없는 일본 사례를 감안하면, 기금형 전환 자체보다 수탁법인 전문성과 지배구조 투명성이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란 지적도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일시금 수령에 대한 정부 견제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퇴직연금 수급 개시 계좌의 87%가 일시금을 택해 제도 본연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이 무력화된 상태다. 이번 합의에서는 강제 폐지 대신 연금 수령 시 퇴직소득세 30~40% 감면이라는 인센티브 방식을 선택했지만, 감면율을 단계적으로 높여 일시금 유인을 서서히 약화시키는 방향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다만 국내 퇴직자들이 일시금을 택하는 데는 구조적 배경이 있다. 주택담보대출 상환, 전세ㆍ주택 마련 등 부동산 관련 목돈 수요가 퇴직 시점에 집중되는 한국 특유의 생애주기 지출 구조가 일시금 수령률 87%를 떠받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매달 소액씩 받는 연금 방식으로는 이 같은 목돈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이 제도 설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제 인센티브가 정교하게 설계되지 않으면 이번 개편이 30년 이상 장기근속 퇴직 근로자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는 “기금형이 노후 보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방향성에는 공감한다. 다만 수탁법인의 책임 범위와 손실 귀책 구조가 명확히 설계되지 않은 채 입법부터 서두르면, 선의의 제도가 기업과 근로자 모두에게 새로운 부담이 될 수 있다”로 지적했다.
최지희 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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