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조선의 슈터부터 대한의 건아까지’ 2000년대 수놓은 국가대표 스타

※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3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이 글에서 가장 먼저 소개해야 할 국가대표는 단연 김주성이다. 김주성은 1998 남자농구 월드컵(당시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대표팀에 선발돼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 이르기까지 무려 16년 동안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5회 연속 아시안게임에 출전했고,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전체 한국 선수 가운데 이를 달성한 건 김주성과 박은옥(여자 스쿼시) 단 2명이었다.
업적도 화려했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남자농구 역사상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를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김주성이다. 대표팀 막내 시절 서장훈과 함께 트윈타워를 이뤘던 김주성은 프로 데뷔 후 속공 가담이 가능한 빅맨으로 주가를 높였고, 높은 수비 이해도를 바탕으로 대표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최고참이자 대표팀 은퇴 무대가 됐던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유재학 감독이 강조했던 빅맨의 외곽수비를 완수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수많은 스타와 대표팀에서 뛰었던 김주성이 꼽은 최고의 파트너는 김승현이었다. 김주성은 “(김)승현이 형과 뛸 때가 제일 재밌었고, 호흡도 잘 맞았다. 일단 공을 주고 뛰면 어떻게든 패스가 왔다. 승현이 형이 은퇴할 때 ‘형이 최고였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금메달 2개로 받는 연금을 장애인, 저소득층 불우이웃에 기부하는 미담도 남겼다. 김주성은 “부모님의 몸이 불편하셔서 어릴 때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어려운 분들을 돕고 싶었는데 어릴 때는 큰돈이 있어야 기부를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작은 기부가 모여 큰 기부가 되는 것이더라. 액수가 큰 건 아니지만 값진 금메달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게 됐고, 부모님과의 약속도 지킨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기부를 이어왔다”라고 말했다.

양동근이 성인 대표팀에 처음 선발된 건 2001년 동아시아대회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최정예 전력은 아니었다. 상무, 대학 선발로 꾸린 팀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성인 대표팀은 2006년 한국에서 열린 친선대회 WBC(월드바스켓볼챌린지)였다.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서니 등 ‘드림팀’을 꾸린 미국, 리투아니아, 이탈리아, 튀르키예가 2006 농구 월드컵에 앞서 전지훈련 차원에서 출전했고, 한국은 도하 아시안게임에 대비해 세대교체를 진행 중이었다. 당시 양동근은 데뷔 2년 차 시즌에 서장훈과 공동 MVP로 선정되는 등 떠오르는 별이었다.
“벽이었다. 벽. 손만 들고 있는데도 패스할 곳을 못 찾았다”라며 미국과의 경기를 회상한 양동근이 꼽은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은 역시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2014 농구 월드컵에 나갔는데 WBC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며 운을 뗀 양동근은 “어려운 과정을 거친 후 아시안게임 우승을 해서 너무 기분 좋았다.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내가 너무 못했다. 그 경기에서 졌다면 4강에서 이란을 만났을 텐데 선수들이 잘한 덕분에 4강에서 일본을 만났고, 결승에서 이란까지 이겼다”라고 돌아봤다.
2011년부터 2015년 대표팀에서 물러날 때까지 주장을 맡았던 양동근은 경쟁 팀들에 경계 대상 1호였다. KBL에서 보여줬던 공수 겸장의 면모를 아시안게임, 아시아컵에서도 보여주며 대표팀의 기둥 역할을 했다. 30대 중반, 국가대표로 출전한 마지막 대회였던 2015 아시아컵에서는 필리핀 언론 ‘인콰이어러’가 선정한 아시아 TOP5 가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20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는 FIBA까지 양동근의 커리어를 조명했다. 공식 소셜미디어에 양동근의 대표팀 시절 사진을 게재하며 한글로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야말로 양동근의 위엄이었다.

1950~1960년대 대표팀의 기록이 전산화되지 않아 대표팀 통산 최다득점, 최다경기 등 기록과 관련된 순위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숫자를 떠나 김종규가 대표팀에서 보여줬던 헌신은 대표팀 동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경희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2011년 아시아컵을 시작으로 2025 아시아컵에 이르기까지. 김종규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무려 103경기를 소화하며 총 747점 400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025 아시아컵에서는 무릎 상태가 온전치 않았지만, 수술받았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그랬듯 대표팀의 부름에 응했다. “대표팀은 내가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자리도, 오기 싫다고 안 올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김종규의 말이다. 특히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이란과의 결승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역전 득점을 만들며 한국이 12년 만의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에 기여했다.
김종규는 아시아컵만 무려 6차례 출전했다. 번번이 우승에 실패했지만, 김종규가 지닌 높이와 속공 가담 능력은 한국이 아시아 무대에서 꾸준히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에 큰 버팀목이 됐다. 공식적으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건 아니지만, 김종규에게는 2025 아시아컵이 국가대표로 출전한 마지막 대회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김종규는 “대단한 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이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마지막 국가대표라는 마음으로 대회를 준비했다.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고, 나이가 들면서 아픈 곳도 많아지면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대표팀은 세대교체 중이고, 좋은 선수도 많이 등장했다. 후배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의 한국 농구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라며 새로운 황금세대에게 힘을 실어줬다.

출전한 대회는 3개, 소화한 경기는 총 21경기에 불과했지만 문태종은 2000년대 국가대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문태종은 2011년 동생 문태영과 함께 특별 귀화했다. 사상 처음으로 시행된 우수인재 복수국적 취득 제도에 따라 대한체육회장의 추천을 받은 후 국적심의위원회에서 만장일치가 나오며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문태종의 특별 귀화를 낙관했던 대표팀은 대한체육회 심사 발표에 앞서 일찌감치 2011 아시아컵 예비명단에 문태종을 포함한 터였다. 36세의 노장으로 대표팀 데뷔 무대를 치렀지만, 문태종은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다. 9경기 가운데 7경기에서 두 자리 득점을 기록하며 한국을 3위로 이끌었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무대는 단연 인천 아시안게임이었다. 문태종은 39세의 나이에도 건재를 과시했다. 8강 조별리그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3점슛 5개 포함 38점을 퍼부으며 한국이 조 1위로 4강에 오르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이란과의 결승전에서 종료 16.9초전 자유투 2개를 모두 넣는 등 19점으로 활약, 한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문태종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KBL 팬들은 나를 알지만, 일반 팬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아시안게임을 통해 내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단상 위에 올라가 애국가를 들을 때 기분도 남달랐다”라고 돌아봤다.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유재학 감독(현 KBL 경기운영본부장) 역시 “해결사 능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슛 하나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 있게 던졌다. 나이 때문인지 수비할 때는 상대 선수를 따라가지 못해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슈터라는 역할만 놓고 봤을 때는 최고였다. 젊었을 때 대표팀에 들어왔다면 한국도 더 많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지금은 대학생, 심지어 만 18세의 선수도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시대지만 2000년대 후반만 해도 대학생 신분으로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는 많지 않았다. 그 틀을 깼던 이가 오세근이었다. 오세근은 중앙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을 통해 성인대표팀에 데뷔했다.
첫 대표팀에서는 김주성과 김민수의 뒤를 받치는 백업 역할을 맡았지만, 이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그리며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된 것은 물론 주전 자리도 꿰찼다. 2009 동아시아대회에서 다양한 공격 스킬을 보여주며 한국 농구의 빅맨 계보를 이을 차세대 주자로 공인받았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선수들 가운데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오세근은 이후에도 아시안게임, 아시아컵, 농구 월드컵 예선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 꾸준히 출전했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상무에서 복무 중 병역 혜택을 받은 최초의 농구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금메달을 획득한 후 곧바로 전역하는 건 아니다. 오세근은 자대로 돌아간 후 절차를 거쳤고, 금메달 획득 후 21일 만에 일병 신분으로 조기 전역했다. 오세근은 “아무래도 전역이 얼마 안 남은 선임보다는 동기들이 부러워했다. 그중에서도 (최)진수의 표정이 제일 안 좋았다(웃음)”라고 돌아봤다.
아시안게임 이후 부상으로 한동안 대표팀과 멀어졌던 오세근은 2017 아시아컵을 통해 대표팀에 돌아왔다. 오세근은 7경기 모두 두 자리 득점을 올리는 등 평균 16점 5.7리바운드로 활약, 한국을 3위로 이끌며 대회 베스트5에 선정됐다. 한국 선수가 아시아컵 베스트5에 이름을 올린 가장 최근 사례가 바로 오세근이다.

대표팀은 2010년에 이례적으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전지훈련을 진행했다. 당시 NBA 최다승 감독이었던 레니 윌킨스에게 기술고문을 맡기는 등 대한민국농구협회는 코트 안팎에서 대표팀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대학선수를 대거 발탁, 합숙훈련에 합류시키며 세대교체도 준비했는데 그 주인공 가운데 1명이 김선형이었다. 오세근, 김종규와 함께 대표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선형, 김종규는 광저우 아시안게임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다. 특히 김선형은 유재학 감독이 염두에 둔 자원이었지만, 부상에서 회복한 하승진의 합류로 눈물을 흘렸다. 동아시아선수권대회를 제외하면, 김선형의 성인대표팀 데뷔 무대는 2012 런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도미니카공화국을 상대로 14점을 기록하며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검증받은 김선형은 이후 아시아컵, 월드컵,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며 세대교체에 힘을 보탰다. 특히 2013 아시아컵 중국과의 경기에서는 이젠리엔의 블록슛 시도를 예측, 한 템포 빠른 타이밍에 덩크슛을 터뜨리며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었다. 중국 캐스터가 놀라움을 표하며 “덩크 베리 머치!”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NBA리거 조던 클락슨과의 맞대결도 빼놓을 수 없다. 발목수술을 받은 이후였음에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8강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17점 7리바운드 10어시스트 4스틸로 맹활약, 한국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선형은 “처음 대표팀에 뽑혔을 땐 외국선수와의 맞대결에서 위축될 때가 있었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면역력이 생겼던 것 같다. 겁먹지 말고 팀 대 팀으로 붙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돌아봤다. 2018 아시안게임을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취재했던 민준구 MK스포츠 기자 역시 “필리핀이 김선형을 당해내질 못했다. 그 경기 한정으로는 클락슨보다 김선형의 경기력이 훨씬 뛰어났다”라고 회상했다.

야구에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가 있다면, 농구에는 ‘조선의 슈터’ 조성민이 있었다. 조성민은 ‘대기만성형’으로 꼽힌다. 상무에서 복무를 마친 이후인 2010년에 처음으로 대표팀에 승선했다. 수비력을 겸비한 슈터는 동서를 막론하고 환영받기 마련. 조성민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1차 예비명단 25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추가 예비명단을 통해 합류한 후 합동훈련에서 유재학 감독의 눈도장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하다. 현대모비스 연습체육관에서 합동훈련을 받았는데 추가로 선발되어서인지 첫날에는 나만 당시 소속팀(KT) 연습복을 입고 훈련했다.” 조성민의 회고다. 조성민은 대표팀 데뷔 무대였던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필리핀과의 8강전에서만 무득점에 그쳤을 뿐, 이외의 7경기에서 평균 10.4점을 기록하며 대표팀의 은메달 획득에 힘을 보탰다. 3점슛 2.2개(성공률 58.1%) 터뜨렸고, 한국 농구 1세대 슈터라 할 수 있는 신동파가 슈터 계보를 이을 선수로 직접 조성민을 지목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조성민은 이후 2016년까지 꾸준히 대표팀의 외곽을 책임졌다. 특히 2014년 7월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렸던 뉴질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폭발력을 발휘, ‘조선의 슈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이 12년 만의 금메달을 획득한 인천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문태종(19점), 김종규(17점)에 이어 팀 내에서 3번째로 높은 득점을 올렸던 이가 조성민이었다. 16점 3리바운드 4어시스트로 활약하며 문태종의 부담을 덜어줬다.
조성민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딴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뉴질랜드와의 평가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솔직히 말하면 평가전 자체가 처음이어서 관중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몸 풀기 위해 체육관에 들어갔을 때 관중석이 꽉 찬 모습을 보며 ‘아직 농구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가전에 불과했지만, 팬들의 응원 덕분에 대표팀도 더 힘을 내서 아시안게임을 준비할 수 있었다”라고 돌아봤다.

최근 달갑지 않은 이슈로 도마 위에 올랐지만, 적어도 대표팀에서의 커리어만 본다면 라건아는 2000년대 한국농구에서 상징하는 바가 대단히 큰 선수였다. 귀화 시험을 거친 전태풍과 이승준, 특별 귀화한 문태종-태영 형제는 한국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던 반면, 라건아는 순수 미국인이었다.
2012-2013시즌에 리카르도 라틀리프란 이름으로 데뷔한 후 줄곧 KBL에서 외국선수로 활약했던 라건아는 2017년 1월, 새해 소망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PASSPORT.” 2014년 국가대표팀 운영위원회를 구성, 애런 헤인즈와 귀화 협상을 진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대한민국농구협회로선 귀가 쫑긋할 코멘트였다.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라건아는 이후 정식 절차를 거쳐 특별 귀화, 목표했던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용인 라 씨 시조에 ‘굳센 아이(健兒)’라는 뜻의 이름을 새긴 라건아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2019 농구 월드컵에서 평균 23점(전체 1위) 14.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한국의 골밑을 책임졌다. 특히 코트디부아르와의 순위결정전에서 26점 16리바운드 3블록슛으로 활약, 한국에 80-71 승리를 안겼다. 이는 한국이 1994년 이집트전(76-69) 이후 월드컵에서 무려 25년 만에 따낸 승리였다.
대한민국농구협회와 국가대표 계약을 맺은 신분이었던 만큼, 라건아는 이후 꾸준히 대표팀의 한 자리를 책임졌다. 총 44경기를 소화하며 평균 22.4점 11.6리바운드 2.1어시스트 0.9블록슛을 남겼다. 라건아는 2024년 5월 대한민국농구협회와의 계약이 만료됐고, 이에 앞서 2024년 2월 아시아컵 예선 윈도우-1을 마친 직후 개인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기자), KBL PHOTOS, FIBA 제공, FIBA 소셜미디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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