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을 든 할머니 조각가’ 김윤신, 깎고 다듬고… 나무와 하나된 70여년

용인=이지윤 기자 2026. 3. 12.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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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골이 옹근 나뭇조각에서 꿈틀대는 자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진한 고동색 통나무를 전기톱으로 깎고 다듬어 하나의 뼈대에 기하학적 덩어리들을 붙인 모양새다.

못 하나 쓰지 않았으나, 나무가 땅에 뿌리내린 듯 단단해 보였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가 내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정신이 깨끗해진 때 톱을 들고 자르기 시작했죠. 이국의 나무는 톱이 튕길 정도로 단단했기에 나무와 톱, 내가 하나 돼야 뜻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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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서 ‘합이합일…’ 회고전
개관 후 처음 韓여성작가 개인전
“구순에도 작업… 하늘이 허락한일”
조각가 인생 70여 년간 나무를 깎고 다듬어 온 김윤신 작가는 “하고자 하는 정신력과 어릴 적부터 가까이한 자연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나이는 의식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명은·호암미술관 제공
기골이 옹근 나뭇조각에서 꿈틀대는 자연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진한 고동색 통나무를 전기톱으로 깎고 다듬어 하나의 뼈대에 기하학적 덩어리들을 붙인 모양새다. 못 하나 쓰지 않았으나, 나무가 땅에 뿌리내린 듯 단단해 보였다. 표면에선 날카로운 끌과 둔탁한 망치의 흔적, 나무 본연의 얼굴인 옹이와 껍질이 숨김 없이 드러났다.

‘전기톱을 든 할머니 조각가’ 김윤신 작가(91)가 70여 년 예술 인생에서 “가장 정든 작품”으로 꼽은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7-88’(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17일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회고전을 통해 처음으로 국내 공개되는 이 작품을 김 작가는 1987년 완성했다. 그가 오직 나무만 보고 1983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지 4년이 지난 시점. 말도 거의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어렵게 구한 통나무 앞, 그는 전기톱을 단단히 쥐고서 숨을 골랐다.

11일 미술관에서 만난 작가는 이 작품을 만들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가 내가 되는 순간을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정신이 깨끗해진 때 톱을 들고 자르기 시작했죠. 이국의 나무는 톱이 튕길 정도로 단단했기에 나무와 톱, 내가 하나 돼야 뜻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과 재료가 하나 됨으로써 작품이라는 또 다른 하나가 탄생하는 과정’은 그의 작업 이념과 직결된다. 작품명이자 전시 부제인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 함축하고 있는 예술 세계의 근간인 셈. 김 작가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인 이번 전시는 조각과 판화, 회화 등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 약 1500점 중 175점을 엄선해 소개한다. 호암미술관이 개관한 1982년 이래 이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한국인 여성 작가는 그가 처음이다.

전시는 196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의 석판화부터, 조각에 회화를 적극적으로 결합한 최근작까지를 아우른다. 아르헨티나와 멕시코를 오가며 작업한 각양각색의 나뭇조각과 오닉스(onyx·천연광물 ‘마노’의 일종) 조각은 지극히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이국적인 인상을 풍긴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수석 큐레이터는 “김 작가는 한국적 감성과 동양적 사유를 토대로 남미의 자연과 문화를 흡수하며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며 “톱질과 망치질로 가득한 그의 조각에서 ‘작가’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요즘의 미술에서 점점 귀해지는 경험”이라고 했다.

작가의 발이 묶였던 팬데믹 기간, 쓰다 남은 나뭇조각과 폐자재를 모아 만든 알록달록한 조각들은 하나로 줄지어 진열됐다. 전시의 대미는 장대하게 팔을 벌린 모양새와 푸르른 청록빛이 산세를 연상케 하는 최신작 ‘노래하는 나무’가 장식한다.

혼신을 담아 재료의 본연에 다가간 그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절로 겸허해진다. 작업을 해야만 숨통이 트인다는 김 작가는 벌써 구순(九旬)을 넘겼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가 주목받은 건 불과 3년 전 개인전을 열고 나서였다.

“고국에 돌아와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하늘이 허락한 일입니다.” 6월 28일까지.

용인=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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