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말이 없는데…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제주방송 김지훈 2026. 3. 1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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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개인전 ‘CRAVE’, 말로 붙잡히기 전의 감정
정지아 作 ‘침묵을 건너는 것들‘ (2026, Color on Korean paper, 100×65.1cm) 꽃과 개미, 인물이 결합된 상징적 화면이 이번 개인전 ‘CRAVE’의 정서를 압축해 보여준다.


전시장 벽에는 얼굴들이 걸려 있습니다.
한 점, 또 한 점. 그리고 다시 얼굴입니다.

처음 마주하면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눈빛은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표정도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걸음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멈춥니다.
잠깐 스쳐 지나가려다 다시 돌아와 그림 앞에 서게 됩니다

정지아 作 ‘우연을 먹고자란 별‘ (No.2, 2024,장지에 채색,80.3x53cm) 별과 인물이 결합된 화면이 정지아 특유의 상징적 구성을 드러낸다.


그제야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꽃 위를 기어가는 작은 곤충, 허공에 떠 있는 별, 어딘가에서 날아와 멈춘 화살.

인물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면 주변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류가 조용히 번집니다.

정지아 개인전 'CRAVE’는 바로 그 순간을 따라가게 만드는 전시입니다.

14일 제주돌문화공원 내 갤러리 누보에서 시작합니다.

정지아 作 ‘찬란한 통증Ⅰ‘ (2024, Color on silk, 116.8x80.3cm) 선명한 색채와 패턴이 결합된 화면.


■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정서

인물들은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울지도, 웃지도 않습니다.

무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얼굴은 아닙니다.
무언가 머물러 있지만 쉽게 말로 옮기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림 앞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 다른 장면이 보입니다.
얼굴 주변에 놓인 작은 존재들이 흐름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관람객은 표정을 읽기보다 그 주변에서 형성되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정지아의 그림은 막 태어나려는 어떤 순간을 붙잡아 둡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어떤 말로 정리되기 이전의 얼굴들과 그 곁을 묵묵히 지키는 작은 생명들을 담았다”고 밝혔습니다.

설명되기 이전의 마음과 그 주변을 스치는 존재들을 함께 그리고 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지아 作 ‘‘와르르‘ (2024, 장지에 채색, 80.3x116.8cm) 심장과 화살이 교차하며 화면 전체에 강한 상징을 형성한다.


■ 오래된 회화 언어, 지금을 담다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형태를 붙잡고 있는 선의 힘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선 위로 채색이 여러 겹 쌓이며 화폭의 밀도가 만들어집니다.

이 작업의 바탕에는 동양 회화 전통인 공필화(工筆畵)가 있습니다.
공필화는 붓의 속도나 즉흥성보다 대상을 세밀하게 다듬어 가는 과정에 무게를 두는 표현 방식입니다.

정지아는 경기예술고등학교 한국화과를 거쳐 중국 중앙미술학원(CAFA)에서 중국화를 전공하며 이 기법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림은 먼저 선으로 형태를 세우고 그 위에 채색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다듬어진 형태와 선명한 색채가 맞물리며 그림에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정지아 作 ‘Bluebird syndromeⅡ‘ (2024, 장지에 채색, 53x80.3cm) 인물 주변에 다양한 이미지가 흩어지며 작가 특유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 젊은 작가의 궤적

정지아는 1990년대 중반 출생 작가로 20대 후반부터 미술계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K-Artist Prize 그랑프리, 2024년 아트코리아 청년작가 공모전 평론가상을 잇따라 받으며 신진 작가군 가운데서도 비교적 빠르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 ASYAAF(아시아프) 등 여러 전시에 참여하며 인물을 중심으로 한 작업을 이어 왔습니다.

전통 회화를 바탕에 두면서도 그 안에 지금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점은 정지아 작업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 갤러리 누보가 꺼내 든 첫 이름, 정지아

이번 개인전은 갤러리 누보가 시작한 신진 작가 프로젝트 ‘New Face 2026’의 첫 전시입니다.

송정희 갤러리 누보 대표는 “완성도 있는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세계를 더 넓게 보여줄 수 있는 전시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며 ”전통 회화의 기반과 동시대 감각을 함께 보여줄 수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정지아를 첫 전시 작가로 선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정교한 채색 기법을 근간으로, 인물 중심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는 점도 이번 전시 작가로 주목받은 이유입니다.

정지아 作 ‘화려한 소멸‘ (2026, Color on Korean paper, 65.1x100cm) 얼굴 일부를 크게 담아 인물의 감정에 시선을 모으게 한다.


■ 그래서 이 그림 앞에서는 시간이 달라진다

정지아의 그림 앞에 서 있으면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 순간 관람객은 의미를 찾기보다 그 장면 안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잠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나가는 경험으로 남습니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이어집니다.

오프닝은 14일 오후 4시, 이날 작가와의 대화도 함께 진행됩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이며  무료입니다.

제주돌문화공원 입장료는 별도입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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