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문화현장] (16) 추리 역할극 게임
김해 책방 ‘냉장서고’서 열린 ‘머더 미스터리’
참여자들 가상 범죄 이야기 속 등장인물 돼
저마다 열차 안 살인사건 비밀 추론 후 발표
“맡은 역 몰입해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 뿌듯”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책방의 앞마당이다. 하지만 귀 기울여보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 서넛이 모여 열띤 추리 토론으로 웅성거린다. 김해의 책방 ‘냉장서고’에서는 이따금 책이 있는 곳 특유의 고유함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하던 소꿉놀이처럼 저마다의 캐릭터를 선택한 후 이야기 속으로 뛰어드는 추리 역할극, ‘머더 미스터리(murder mystery) 게임’이 수시로 열리기 때문이다.
머더 미스터리 게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드게임과 유사하다. 하나의 게임 제품 속에 그 게임만의 정해진 세계관과 게임 도구, 규칙이 존재한다. 다만 소설 ‘셜록 홈스’처럼 가상의 범죄 이야기가 존재하고, 참여자들은 해당 이야기 속 한 명의 등장인물이 돼 사건의 진실과 범인을 추리해야 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냉장서고’에서의 게임은 책방지기 백정훈(37) 대표가 SNS에 모집 글을 올리면, 누구든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몰입도가 큰 만큼 마니아층이 탄탄한 게임이기에 모집 인원이 선착순으로 마감됐을까 마음 졸이며 책방에 문의했다. 놀랍게도 돌아온 답변은 흔쾌한 수락. 아홉 명이었던 오늘 모임의 정원 중 한 사람이 갑작스레 불참하게 돼 기자가 껴도 된다는, 신기한 우연을 누리게 됐다.
간신히 입성한 냉장서고의 서점 앞마당에서 하루 동안 함께 게임에 참여할 여덟 사람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눴다. 성별도 고루 섞여 있고, 연령대도 20대와 30대, 40대로 무엇 하나 공통 분모가 없는 이들이 추리 역할극 하나를 위해 책방에 모였다. 이날 함께 하기로 한 게임은 9인 정원의 머더 미스터리 게임 ‘새장 속 제비는 꿈을 꾼다’.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기차에 탄 아홉 등장인물이 열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줄거리다.
이름 대신 직업으로 불리는 ‘새장 속 제비는 꿈을 꾼다’의 캐릭터들은 의사와 승무원, 차장, 사업가, 학생, 귀족, 화가, 가정부, 소방관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한 사람이 열차 살인사건의 숨은 범인이다. 게임 상자를 열면 해당 인물들의 각기 설정과 비밀, 범행이 이뤄지던 당시의 행각을 정리한 ‘인물 설정집’ 9권이 나온다. 참여자들이 분하고 싶은 인물을 한 명씩 골라 그 캐릭터의 이야기 책 한 권씩을 다 읽고 나면 본격적인 추리 게임이 시작된다.

초심자이니 제일 먼저 고르게 해 주겠다는 배려에 기자는 냉큼 가장 범인이 아닐 것 같다 싶은 인물, ‘화가’의 설정집을 집어 들었다. ‘머더 미스터리’에 입문하자마자 범인 역할을 맡게 되면 함께하는 8명의 추리 역할극 마니아들을 도저히 다 속일 수 없을 것 같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 촉이 맞았는지는 게임의 비밀인지라, 직접 참여해 알아보기를 권한다.
한 사람당 하나의 역할을 정한 후에는 순서대로 돌아가며 사건의 진실이 담긴 ‘단서’ 카드를 한 장씩 뽑는다. 그렇게 힌트를 얻어 자신만의 추리를 그려보고, 상대의 정보를 얻으려 다른 캐릭터를 맡은 사람에게 비밀 대화를 신청하기도 한다. 인물마다 알고 있는 이야기와 뽑은 카드가 다르다 보니 추리를 완성하기 위해선 누구 하나 소외될 수 없는 구조다. 최대한 다양한 이들에게 번갈아 대화를 신청하고 ‘이 사람이 범인이네’, ‘저 사람 이상하네’ 하며 모두와 어울리게 된다. 내성적인 걸로 어디 가서 빠져본 적 없는 기자도 이날 스스로의 추리를 여기저기 주장하느라 목이 쉬었다.
두 시간 여의 추리 시간을 다 쓰고 나면 다시 한 테이블에 모여 앉는다. 그리고 아홉 사람이 저마다 써 본 아홉 개의 추리 이야기를 발표한다. 발표가 끝나면 사건의 진실이 담긴 ‘엔딩북’을 다 같이 확인하는 것으로 역할극은 종료된다. 여느 게임들과 달리 승패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맡은 인물에 몰입해 범인 찾기에 진심이 된 만큼, 자신이 세운 추리가 진실과 얼마만큼 유사하냐에 승리보다 더한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기자는 수많은 헛추론으로 진실 근처에도 못 가봤다.

그런데도 들인 시간이 헛되진 않았다 느낀 건, 게임에 참가자로도 함께 했던 백정훈 대표의 말 덕분이었다. 이야기가 좋아 책을 파는 서점을 열었고, 그 공간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다양한 문화 모임을 열고 있다는 백 대표는 “한 권의 책 같은 추리 역할극 게임의 장점은 어떤 사람들과 게임을 하느냐에 따라서 수만 갈래의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라 말했다. 오늘 이 사람들의 조합으로 게임을 시작해 만든 아홉 개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다시 접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잔잔한 책방의 고요를 깬 머더 미스터리 게임처럼 잔잔한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고 싶다면, 나만의 방식으로 오늘의 동료들과 하나뿐인 추리 소설을 만들러 뛰어드는 건 어떨까.
글·사진= 장유진 기자 ureal@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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