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노동자의 마음, 주식 투자자의 마음
노동계급 동질감과 연대감은 약화
새 사회안전망 구축도 난망할 듯
편집자주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뉴스룸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미국·이란 전쟁 발발로 상승세가 다소 진정되기는 했지만, 반도체 산업 슈퍼사이클과 이재명 정부의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이 맞물리며 국내 주식시장 호황세가 이어지고 있다. 모임 자리마다 주식투자 얘기가 빠지지 않고,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투자지식을 가르치는 금융캠프가 문전성시라는 소문도 들린다. 주식시장 호황은 대체로 기업의 성장과 국민자산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너나없이 주주가 되기를 바라는 ‘국민투자자 시대’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바뀔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개미투자자로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미국·이란 전쟁 개전 이후 전황이 바뀔 때마다 내가 가진 주식 가격 등락에 눈길이 먼저 가는 게 사실이다. 초등학교에 미사일이 떨어져 아동 170명이 폭사하는 참사 뉴스를 접하고도 “그래도 나는 방산주는 사지 않았다”는 정도로 면죄부 삼으려 할 뿐이다. 지난 1월 현대자동차가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공개한 후 이 회사 노조가 “단 1대의 로봇도 현장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 했을 때 나온 대중의 반발도 이해가 된다. 현대차 노조를 향해 ‘21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을 한다’는 식의 성마른 분노가 집중됐는데, 공교롭게도 아틀라스 공개 이후 회사 주가는 수직상승했다. 이른바 '귀족노조'에 대한 오해도 작용했겠지만, 대중에게 각인된 투자자 정체성과 무관한 현상이었을까.
노동자들이 주식투자자가 되면 정체성의 딜레마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 가정이겠지만, 자사주를 배당받거나 성과급으로 회사주식을 산 대형반도체 회사의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을 당할 상황에 놓였다고 치자. 자신은 구조조정 대상에서 빠졌고, 구조조정이 지체돼 회사가치가 하락할 상황이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과연 노동자 계급의 연대의식을 발휘해 함께 구조조정 반대 투쟁에 나설 수 있을까. 얼마 전 아틀라스가 등장한 뒤 폭풍 전야 상황인 울산 현장을 취재한 본보의 르포 기사를 읽으면서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높은 연봉과 두터운 복리후생으로 ‘킹산직’으로 불리는 한 생산직 청년 노동자도 “역시 답은 주식이야”라며 주식 앱을 만지작거렸다고 기사는 묘사한다.
전문가들은 개개인의 투자자 정체성이 강해질수록 노동의 의미가 변질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생계수단을 넘어 자아실현의 수단이기도 한 노동의 전통적 의미는 빛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전화통화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소득보다 금융소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 굳이 노동가치의 실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일터에서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노동, 이른바‘가짜노동’(의전과 의례 등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노동)만 하려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투자자 정체성의 강화는 이미 허물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동질성을 완전히 해체시킬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시장 유연화가 특징인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들에게 ‘기업가적 자아’를 품도록 독려하고 있는 상황이다(김수영 ‘필연적 혼자의 시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해도 걱정을 감출 수 없다. 지난 세기 서구에 구축된 튼튼한 사회안전망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지만, 계급적으로 동질감을 느꼈던 노동자들이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인공지능(AI) 고도화로 기술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들이 실업, 빈곤, 질병이라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노동자의 마음은 사라지고 투자자의 마음만 남은 공동체에 이 위기를 함께 헤쳐나갈 안전망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이왕구 논설위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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