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묵향으로 사람을 잇다…25년 봉사 이어온 서예가 강성태

서의수 기자 2026. 3. 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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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훈·영정 휘호 무료 봉사…“예술은 나눌 때 살아 움직인다”
경북 포항 중심 40년 서예 인생, 지역 문화 생태계에 온기
▲ 강성태 서예가가 작업실에서 작품을 완성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 서의수 기자

서예는 고요한 예술이지만, 심산(心山) 강성태(61) 서예가의 붓끝은 늘 사람들 곁에 있다. 포항을 중심으로 40여 년간 서예 외길을 걸어온 그는 25년 넘게 지역사회 봉사를 이어오며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왔다. 전시장에서 완성되는 작품 못지않게, 시민의 손에 건네지는 한 장의 가훈을 더 소중히 여기는 그의 예술 철학은 포항과 경북지역 문화예술계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시인이자 서예가로 활동하는 강 씨의 서예 인생은 곧 지역사회와 함께한 시간이다. 작품 활동과 후학 양성, 문학 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예술은 나눌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작업실은 단순한 창작 공간을 넘어 지역 문화의 거점이 되어왔으며, 그가 써내려간 수많은 글씨는 포항 시민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 지난 2월 17일 설날 가훈 써주기 활동 장면. 강성태씨 제공

△호미곶에서 시작된 봉사의 여정

강 서예가의 본격적인 봉사 활동은 1999년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 축전에서 시작됐다. 새해를 맞아 시민들에게 무료로 가훈을 써주었던 그날 이후, 설·추석 명절과 지역 축제, 전통문화 행사 현장에서 '찾아가는 가훈 써주기'는 그의 연례 일정이 됐다.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써준 가훈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행사장 한편, 작은 책상 위에 펼쳐진 화선지. 강 서예가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듣고 즉석에서 문구를 구성해 써 내려간다. '화목(和睦)', '정직(正直)', '근면(勤勉)' 같은 전통적 가치에서부터, 자녀의 진로와 가족의 바람을 담은 맞춤형 문구까지 다양하다. 그의 가훈 써주기는 단순한 글씨 쓰기가 아니라 한 가정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는 소통의 과정이다.

그는 가훈을 써주기 전 먼저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듣고, 가족의 분위기와 고민을 읽는다. 그리고 그 가정에 어울리는 한 문장을 구성한다. "가훈은 집안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과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각 가정의 상황과 가치관을 반영한 맞춤형 가훈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가족 구성원들에게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명절 기간 동안 수백 장의 글씨를 써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강 서예가는 "힘들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채워진다"고 말한다. 봉사는 또 하나의 창작이며, 가장 살아있는 전시라는 설명이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이 소수의 관람객과 만난다면, 가훈은 가정마다 벽에 걸려 매일 가족들과 호흡한다. 그에게 이것은 예술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다.

▲ 강성태 서예가가 '우리집' 작품을 가리키며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서의수 기자

△마지막을 기리는 정성, 영정 휘호 봉사

강 서예가는 지역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에 들어갈 휘호를 무료로 써주는 활동도 오랜 기간 이어오고 있다. 고인의 삶을 기리는 글귀를 정성껏 적어 유가족에게 전달하는 이 봉사는 그의 예술 활동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마지막을 기리는 글씨일수록 더 깊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정한 필획 하나, 여백의 균형 하나까지도 고인에 대한 예우라는 생각에서다. 영정 휘호는 단순히 이름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압축하고, 그 존엄을 글씨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유가족에게는 위로가 되고, 후손에게는 기억이 되는 글씨. 그의 붓끝은 슬픔의 공간에서도 묵묵히 역할을 다한다.

영정 휘호 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인의 부탁에서 비롯됐다. 한 번의 부탁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역 어르신들의 영정 휘호를 맡게 됐고, 이제는 포항 지역에서 강성태 서예가의 영정 휘호는 하나의 전통처럼 자리 잡았다. 그는 영정 휘호를 의뢰받으면 고인의 생전 이야기를 듣고, 그 분의 성품과 삶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그 분을 기리는 글씨를 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복지시설과 요양원, 취약계층 가정을 찾아 좌우명과 격려 문구를 전달하며 정서적 지지를 이어가고 있다. "글씨는 벽에 걸리지만 의미는 마음에 남아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봉사는 단순한 재능기부를 넘어 정서적 치유의 성격을 띤다. 특히 요양원 어르신들은 강 서예가가 써준 글씨를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전통의 가치, 붓글씨의 온기가 어르신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포스코 붓글씨봉사단, 나눔의 확장

강 서예가의 봉사 활동은 개인 차원을 넘어 조직적인 형태로도 확장됐다. 그는 포스코 재직 시절 붓글씨봉사단장을 맡아 동료들과 함께 지역사회 봉사에 나섰다.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은 명절과 지역 축제 때마다 시민들에게 가훈과 덕담을 써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봉사 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강 서예가는 봉사단을 이끌면서 단순히 글씨를 나눠주는 것을 넘어, 서예의 가치와 전통문화의 의미를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봉사 현장에서 시민들에게 서예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붓을 잡는 법을 알려주며,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일회성 봉사를 넘어 문화 교육의 성격을 띠는 활동이었다.

또한 그는 포스코 사진봉사단장도 겸임하며 다양한 형태의 재능기부를 실천했다. 사진봉사단은 지역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을 무료로 촬영해드리는 활동을 펼쳤으며, 이는 영정 휘호 봉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강 서예가는 "예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눌 때 더 큰 의미를 갖는다"며 동료들과의 협업을 통한 봉사 활동의 가치를 강조했다.

△예술의 사회적 확장, 지역 문화 생태계의 거점

강 서예가는 서예가이자 시조작가로 활동하며 지역 문화예술 저변 확대에도 기여해왔다. 각종 전시와 문학 활동, 후학 양성, 지역 문화행사 참여를 통해 예술의 공공성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사)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 시조분과위원장, 맥시조문학회 회장, 포항문인협회 회원, 포항미술협회 회원, 포항서예가협회 회장 등 다양한 문화예술 단체에서 활동하며 지역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역 축제 현장 휘호, 공공기관 기념 글씨 제작, 시민 대상 문화 프로그램 참여 등은 모두 '예술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그는 "예술가는 작품으로만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어떻게 호흡하느냐로도 평가받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철학은 그의 모든 활동에 일관되게 흐르는 핵심 가치다.

그의 작업실은 단순한 창작 공간이 아니라 지역 문화의 거점 역할을 한다. 제자들과 시민들이 드나들며 서예를 배우고, 작품을 감상하고, 전통문화의 가치를 공유한다. 이는 지역 문화 생태계에 지속적인 온기를 불어넣는 기반이 되고 있다. 강 서예가는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이어서, 그의 제자들 중 상당수가 지역에서 서예가로 활동하며 스승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그는 전통 서예의 현대적 계승에 관심이 많다. 고전적인 서체와 기법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표현 방식을 모색한다. 이러한 노력은 젊은 세대에게 서예를 친근하게 다가가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이는 그가 추구하는 '살아있는 예술'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시조와 서예, 두 예술의 만남

강 씨는 1994년 계간 현대시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조작가로 등단했다. 포스코에 다니면서 40여 년간 시조 창작과 서예 작품활동을 여기(餘技)로 병행해온 그는, 두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시조의 간결한 운율과 서예의 절제된 미학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융합된다.

그에게 시조와 서예는 별개의 예술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에서 나온 두 가지 표현 방식이다. 시조가 언어로 마음을 표현한다면, 서예는 선과 획으로 정신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시조를 직접 서예 작품으로 옮기기도 하며, 이는 문학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한다.

지난해 연말, 포스코 정년퇴직을 기념해 그는 첫 시조집 '그리움의 날갯짓'과 칼럼집 '스침과 스밈'(도서출판 신진)을 동시에 펴냈다. 40여 년간 쌓아온 문학적 성찰과 삶의 지혜가 담긴 이 두 권의 책은 그의 예술 인생을 집약한 결실이다. 시조집에는 고향과 자연, 인생과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으며, 칼럼집에는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진리들이 담백한 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 강성태 서예가가 설맞이 붓글씨 봉사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새해 덕담 글귀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성태씨 제공

△묵향이 전하는 위로와 치유

강 서예가의 봉사 활동 중 특히 의미 있는 것은 복지시설과 요양원을 찾아가는 활동이다. 그는 정기적으로 지역의 복지시설을 방문해 어르신들과 장애인들에게 좌우명과 격려 문구를 써드린다. 이 활동은 단순한 재능기부를 넘어 정서적 치유의 효과를 가져온다.

강 서예가는 "글씨는 벽에 걸리지만 의미는 마음에 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봉사는 단순히 글씨를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씨에 담긴 마음과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봉사가 25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다.

강 서예가는 "서예는 마음을 전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글씨를 쓸 때마다 받을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가 그의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묵향(墨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강성태 서예가의 붓끝에서 시작된 온기는 오늘도 지역사회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그의 글씨는 작품을 넘어 사람을 잇고, 공동체를 단단하게 세우는 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