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안에 갇힌 동물들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한겨레 2026. 3. 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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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야생 코끼리의 공격으로 인명사고가 난 타이 카오야이 국립공원에서 관광객이 도로에 나타난 야생 코끼리를 뒤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남종영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풀숲이 푸석 흔들렸다. 지난 2월 타이 카오야이 국립공원에서였다. 멈춰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코끼리예요?” “네, 맞아요. 저기.”

나는 갑옷 같은 회색 엉덩이만 봤다. 그게 전부였다. 야생 코끼리 보기가 쉽지 않다는데, 이 정도면 신이 별을 던져준 거지. 아니다. 별이 아니었다. 폭포와 삼바사슴 그리고 음식을 훔치는 원숭이를 등지고 공원을 나서는데, 이게 뭐야. 그 코끼리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거다.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아이돌을 쫓듯 따라 움직였다. 코끼리가 멈추면 사람도 멈추고, 코끼리가 걸으면 사람도 걸었다. 인간과 야생동물이 기묘하게 얽힌 풍경이었다. 왜 기묘하냐고? 불과 며칠 전 바로 이곳에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코끼리의 이름은 ‘달콤한 사탕수수’라는 뜻의 ‘플라이 오이완’이었다. 세차례 인명사고에 연루된 ‘살인 코끼리’였다. 2024년 야생 코끼리 관리 봉사자가 희생됐고, 2025년 숲에서 열매를 따던 주민이 숨졌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달 2일 아침, 캠핑장에서 아내와 운동하던 60대 남성이 변을 당했다. 발정기였던 수코끼리 오이완은 먹이가 부족한 건기에 인간의 텐트 옆까지 내려온 것이다. 건기인 1~2월은 코끼리의 활동 반경이 가장 넓은 시기인 동시에, 카오야이에 캠핑족이 가장 많이 들 때다. 코끼리의 생체 리듬과 인간의 관광 성수기가 최악의 타이밍에 마주쳤다.

당신이 치앙마이에서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 셀카를 찍어본 적이 있다면, 코끼리와 인간의 충돌이 잦다는 사실이 낯설 수 있다. 타이에서 야생 코끼리는 멸종위기종이다. 20세기 초반 10만마리에 달했던 코끼리는 벌목 노동에 동원되고 서식지가 파편화하면서 4천여마리로 줄었다. 그러나 최근 개체수가 증가하고 있다. 국립공원 같은 ‘요새’ 덕분이다. 요새 안에서 코끼리는 보호받는다. 문제는 요새 밖이다. 최근 3년간 야생 코끼리가 보전지역을 이탈한 횟수는 3만7000번이 넘는다. 2012년 이후 코끼리와 충돌해 227명이 숨졌다. 타이 정부의 대응은? 서식지를 넓히는 대신, 암코끼리에게 피임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코끼리가 너무 많다는 거다. 멸종위기종인데.

이것이 보전학자 댄 브로킹턴이 비판한 ‘요새형 보전’의 딜레마다. 야생의 땅과 인간의 땅을 두부 자르듯 나눠, 요새 안에서만 동물을 지키겠다는 근대적 발상이다. 1872년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시작된 이 모델은 전세계로 퍼졌다. 원주민을 몰아내고 ‘야생 보전의 요새’를 세웠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적 성격에 관한 비판이 있었지만, 야생 보전에서 성과가 없진 않았다. 타이의 야생 코끼리가 다시 늘어난 것도, 지리산에 반달곰 90여마리가 뛰어다니는 것도 요새 덕분이다. 하지만 요새는 자연과 인간은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 세워진 철조망이다.

150년간 이어진 이 모델은 지금 막다른 길에 서 있다. 2015년 짐바브웨 황게 국립공원의 사자 세실은 요새 안에서 불가침의 존재였지만, 요새 밖으로 나간 순간 5만달러짜리 트로피(기념품 박제)가 되었다. 한국 지리산의 반달곰 오삼이(KM53)도 마찬가지다. 그는 2017년부터 세차례나 밖으로 나갔다가 수거되기를 반복했다. 오삼이는 야생동물로서 ‘서식지 탐색’이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을 했을 뿐인데, 인간은 그것을 지리산 ‘탈출’이라 불렀다. 가야산, 수도산을 거쳐 충북 보은까지 개척했고, 고속도로를 건너다 버스에 치여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당국은 민가 접근과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대응팀을 꾸려 쫓아다녔다. 2023년 6월, 사고 발생을 우려해 오삼이를 수거하기로 결정했다. 마취총을 쐈다. 마취가 덜 된 오삼이는 계곡 쪽으로 내달리다 떨어져 익사했다.

오이완과 세실과 오삼이는 묻는다. 누구를 위한 요새인가? 요새형 보전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할 수 있다는 신화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건기의 코끼리는 울타리를 모른다. 번식기의 곰은 국립공원 경계를 읽지 못한다. 높은 울타리 대신 요새와 요새를 잇는 회랑을 만들고, 종국에는 분리가 아닌 함께 살기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카오야이 국립공원을 나서는데, 경계 밖 아스팔트 위에 커다란 똥 무더기가 흩어져 있었다. 코끼리는 하루에 50㎏ 똥을 싼다. 요새 안이든 요새 밖이든. 동물들은 국경을 알지 못한다. 인간만 안다. 인간이 그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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