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금융 도시의 그늘…AI 열풍 속에도 공실 남은 샌프란시스코 [AI發 연공편향 공포]

샌프란시스코(미국)=이수진 기자 2026. 3. 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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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으로 시작된 재택근무·오피스 공실
AI 붐에도 회복되지 못한 채 한산한 거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 취업 어려워지고
고용시장 악화 전망…AI 인력만 남는 기업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융가 중심인 샌섬 스트리트(Sansome Street)의 모습.(샌프란시스코(미국)=이수진 기자)

이달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중심부인 유니언스퀘어 인근 거리. 한때 세계 금융과 기술 권력이 교차하며 활기가 넘치던 이곳은 이제 ‘임대 문의(For Lease)’가 적힌 하얀 종이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빌딩 쇼윈도마다 붙은 이 딱지들은 마치 화려했던 도심의 몰락을 알리는 부고장처럼 보였다.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AI) 기술이 탄생하는 도시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거리 곳곳에는 마약에 취한 듯 초점을 잃고 비틀거리는 이들과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숙자들이 눈에 띄었다. 명품 매장들 사이로 이가 빠진 듯 드러난 공실들은 도심 공동화 현상의 깊이를 짐작게 했다.

샌프란시스코가 독특한 산업 생태계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세계 스타트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스탠퍼드대와 UC버클리 등 우수한 대학들이 기술 인재를 꾸준히 배출해왔다. 여기에 풍부한 벤처캐피털과 활발한 창업 문화가 결합되며 혁신이 계속 탄생하는 환경이 형성됐다. 미국 전역은 물론 해외 인재들까지 끌어들이는 힘도 여전히 강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니언스퀘어 근처 명품가에 공실이 드문드문 보였다. 사진은 페레가모 매장 양 옆으로 상가가 비어있는 모습.(샌프란시스코(미국)=이수진 기자)


AI 산업은 2년 전부터 빠르게 성장했지만 정작 도시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관광지를 벗어나 오피스 밀집 지역으로 향해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AI 기업들이 주로 입주해 있는 소마(SoMa)와 파이낸셜 디스트릭트(Financial District) 일대 역시 다소 한산했다. 뉴욕의 월 스트리트’와 닮은 몽고메리 스트리트(Montgomery Street) 주변 식당가도 점심시간임에도 붐비지 않았다.

이 일대 카페에서 3년째 일하고 있는 멕시코 국적의 파울라(Paula)는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상권이 크게 위축됐다”며 “최근 AI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도시 인구가 특별히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유니언스퀘어 근처 명품가에 공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샌프란시스코(미국)=이수진 기자)


26년째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중국 출신 발레리 치엥(Valerie Chieng)은 매장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예전에는 식당마다 직원이 10명씩 있었지만 지금은 디지털화와 AI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며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팬데믹 이후 사람이 조금 늘긴 했지만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면 여전히 거리는 한산하다”고 덧붙였다.

샌프란시스코 도심이 비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였다.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도입하면서 직장인들이 도시 밖으로 이동했고 사무실과 상권도 함께 침체됐다. 이후 AI 산업이 급성장하며 도시가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현지에서는 여전히 회복 속도가 더디다는 평가가 많다.

실리콘밸리 반도체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A 씨는 “과거에는 빅테크 기업 직원들이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근무하며 회사가 통근 버스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 규모가 많이 줄었다”며 “특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자리를 잃고 명문대를 나온 20~30대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 주인이 없는 오피스 거리 사이로 자율주행 차량 ‘웨이모(Waymo)’이 지나가고 있다.(샌프란시스코(미국)=이수진 기자)


현지에서 택시 호출 서비스 우버(Uber)를 부업으로 운전하고 있는 40대 비(Vii)는 낮에는 페덱스(FedEx)에서 전기 엔지니어로서 일을 하고 퇴근길에 택시 운행을 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저는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2년 후에는 상황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다”며 “회사 입장에서 40살 엔지니어와 21살 AI 개발자가 있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비는 또 “과거에는 프로젝트를 받으면 며칠에 걸쳐 코딩을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AI에 입력하면 몇 초 만에 코드가 생성된다”며 “그 많던 단순 코딩 인력은 점점 필요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택시 기사들의 수입도 줄어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험 등 온갖 플랫폼 서비스가 늘어나며 우버 운전자가 실제로 가져가는 수익이 줄었고, AI 기반 자율주행 택시 웨이모(Waymo)의 등장도 장기적으로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며 “미국 경제가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고용 시장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지 부동산 업계에서도 비슷한 진단이 나온다. 현지 부동산 기업 관계자는 “AI 기업들이 최근 상당한 규모의 오피스 공간을 임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팬데믹 이후 시장에 쏟아진 방대한 공실 물량을 모두 흡수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달리는 버스 외벽에는 ‘Build AI that works(실제로 작동하는 AI를 만들어라)’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가 붙어 있었다. AI 인재 채용 플랫폼 ‘브레인트러스트(Braintrust)’의 광고다. 도시 곳곳에서 AI 기업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샌프란시스코(미국)=이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