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즈이의 반격…안세영, 혼자 뛰면 멀리 못 간다[임성일의 맥]

임성일 스포츠전문기자 2026. 3. 1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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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오픈 결승서 2인자 왕즈이에 패…36연승 마감
적수 없는 독주보다는 라이벌의 자극이 롱런 도와
금메달을 딴 안세영(오른쪽)이 2025년 12월21일 중국 항저우 올림픽스포츠센터 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 투어 파이널 여자단식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딴 중국의 왕즈이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안세영이 여자단식 세계랭킹 1위, 왕즈이는 2위다. ⓒ AFP=뉴스1

(서울=뉴스1) 임성일 스포츠전문기자 = 지난 9일 새벽, 영국에서 믿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한동안 지는 법을 잊고 지내던 안세영(24·삼성생명)이 최고 권위 배드민턴 대회 '전영오픈' 결승에서 왕즈이(중국)에게 덜미를 잡혔다. 내용부터 스코어까지, 토 달기 힘든 완패였다.

여자단식 세계랭킹 1위 안세영은 9일 새벽 영국 버밍엄의 유틸리타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1000 전영오픈 결승에서 왕즈이에게 0-2(15-21 19-21)로 졌다. 안세영 경기 기사가 '졌다'로 끝난 기억, 한참 전이다.

지난해 전영오픈 우승자인 안세영은 한국 단식 선수 최초의 2연패이자 통산 3번째 트로피에 도전했으나 성사 직전 무산됐다. 공식대회 연승 기록도 36경기에서 중단됐다.

안세영은 지난해 9월 수원에서 열린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일본의 야마구치에게 패한 뒤 이번 대회 준결승까지 36번을 내리 이기다 결승에서 제동이 걸렸다. 왕즈이 상대 연승 행진도 멈췄다. 안세영은 지난해부터 왕즈이에게 10연승을 달리다 오랜만에 쓴맛을 봤다.

왕즈이는 중국 여자 배드민턴 간판이자 여자단식 랭킹 2위의 강호다. 지난해에도 3개의 국제대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다만, 안세영 앞에만 서면 작아졌다. 왕즈이는 2025년 준우승만 8번 차지했는데, 그중 7번이 결승에서 안세영에게 패한 결과다. 2026년 역시 1월 말레이시아오픈과 인도오픈 결승에서 안세영을 넘지 못해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배드민턴 안세영이 8일(한국시간) 영국 버밍엄의 유틸리타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1000 전영오픈 결승 왕즈이와의 경기에서 리턴을 하고 있다. 안세영은 왕즈이에 0-2(15-21, 19-21)로 완패해 준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대회 연승 기록도 36경기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 AFP=뉴스1

적어도 최근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2인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두 선수 맞대결을 본 팬들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왕즈이의 허탈한 표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왕즈이에게 안세영이란 점점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번 전영오픈 결승도 '안세영의 당연한 승리'를 점치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9일 새벽 펼쳐진 그림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안세영의 컨디션이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샷의 정교함이 떨어졌고 멘털도 평소와는 달랐다. 셔틀콕이 라인을 살짝 벗어나거나 네트에 걸리는 실수가 자주 나왔으며 세계 최고 권위 대회 2연패가 아른거린 탓인지 조급한 모습도 읽혔다. 이런 것보다 근본적인 패배의 원인은, 왕즈이가 워낙 잘했다.

전영오픈 결승에서의 왕즈이 플레이는 마치 안세영 같았다. 안세영의 전매특허인, 코트 어느 곳으로 공격해도 다 받아내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몸놀림이 왕즈이에게서 나왔다. 이쯤이면 포인트겠다 싶은 회심의 공격이 다 막히자 안세영이 고개 숙이고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모든 것이 잘 풀린 '왕즈이의 날'로 해석하면 편하다. 하지만 안세영이라는 벽을 넘어 기어이 정상에 오르겠다는 강한 투지와 진한 땀이 만든 결과다. 승리가 확정된 후 왕즈이는 눈물 대신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운도 우연도 아니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해도 좋을만한 완벽한 승리였다.

안세영 입장에서는 쓰라린 패배였다. 여러 기록이 깨지고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다. 왕즈이와의 경기 전까지, 올해 치른 17경기에서 패배는 고사하고 게임(세트 개념)을 상대에게 내준 것도 2번뿐 일 정도로 '무적 모드'였는데 하필 중요한 경기에서 무너졌으니 타격이 크다.

하지만 긴 안목에서 볼 때 이번 '왕즈이의 반격'은 안세영의 향후 레이스에 그리 나쁠 것 없는 자극이다. 혼자서 달리면 그리 멀리 못 간다.

테니스계의 라이벌 노박 조코비치(왼쪽), 라파엘 나달. 2024.7.25 ⓒ 뉴스1 이동해 기자

"선수 생활을 하면서 조코비치와 함께한 모든 순간을 고맙게 생각한다. 내 한계를 넘어서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하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2025년 테니스 코트를 떠난 '흙신' 라파엘 나달의 말이다. 나달 옆에 노박 조코비치가 그리고 로저 페더러가 있었기에 긴 시간 정상급 기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남자 테니스계를 호령한 '빅3'의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고 끌어내린 덕분에 길게 이어졌다.

1985년생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1987년생 리오넬 메시가 풋풋한 청년 시절 세계 축구계에 등장한 뒤 불혹에 이른 지금까지 필드를 누비며 '두 개의 태양'으로 빛날 수 있었던 것 역시 라이벌 관계가 주는 건강한 자극과 견제 영향이 크다. 커리어 처음으로 2006 독일 월드컵을 밟은 두 선수는 다가오는 2026 북중미 월드컵 본선도 준비 중이다.

정상을 지키는 게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힘들다는 것은 참이다. 높고 좁은 곳에서 스스로를 바늘로 계속 찔러야하는 차가운 싸움까지 병행해야한다. 혼자서는 쉽지 않다. 나달의 말처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돕는 맞적수가 있어야 오래 뛸 수 있다.

안세영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승리가 가져다주는 선물은 이미 차고 넘친다. 패배로, 상실감으로 채워지는 것들이 필요한 시점에 좋은 약을 먹었다.

lastuncl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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