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품으로 걸린 상업 포스터… 프라하에서 만난 알폰스 무하
체코 프라하 '무하 박물관'
거리의 예술에서 박물관의 걸작으로
일러스트레이터 알폰스 무하
홍보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요즘은 포스터에 담은 그림도 인기가 꽤 많다.
19세기 말에도 비슷했다. 파리 거리에는 화려한 포스터가 빼곡했다. 극장이나 카페 그리고 샴페인과 담배를 홍보하는 이미지가 벽에 가득했다. 포스터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세련된 디자인과 인상적인 이미지로 서로 경쟁했다.
파리지앵은 그런 포스터를 탐내기도 했다.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스터를 몰래 떼어서 집에 걸기도 했다. 이 현상에 이름까지 붙었다. 바로 ‘포스터 수집 열풍’이라는 뜻의 ‘아피쇼마니(Affichomanie)’이다.
광고를 실은 종이를 예술품으로 여기고 소장하는 일이 유행한 것이다. 삽화가이자 상업 이미지 제작자인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도 점차 늘어났다. 신문과 잡지 산업이 급격히 성장한 덕분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열풍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이다. 그는 체코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이다. 프라하의 판스카 거리(Panská Street)에는 그의 이름을 딴 무하 박물관(Mucha Museum)이 있다.
물론 이곳에 있는 포스터들은 그가 활동한 19세기 파리 거리의 벽에서 몰래 떼어 온 것은 아니다. 무하 박물관은 세계 최초로 무하의 생애와 작업을 조명한 공간이다. 프라하 구시가지의 번잡한 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비교적 작은 전시 공간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아담했다. 그러나 벽에 걸린 포스터는 결코 작거나 수가 적지 않았다.

나는 디지털 이미지로 무하의 작품을 접하면서 대부분 크기가 신용카드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로 카드처럼 아기자기한 이미지 탓이었을까? 커 봤자 손바닥만 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파리의 연극 포스터나 샴페인, 담배 광고 포스터는 요즘 우리가 보는 포스터보다 훨씬 크고 기다란 것까지 다양했다.
무하의 작업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연한 파스텔 톤의 색감, 화면을 채우는 꽃이나 덩굴 같은 장식적 디테일, 그리고 중심에 서 있는 여성 인물 등이다. 작품 속 아름다운 여인은 계절이나 별자리 또는 특정 상품 같은 추상적 개념을 대신한다. ‘알레고리’라는 오랜 표현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품의 선은 끊어지기보다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이 장식성은 상업적 목적과도 부합한다. 포스터는 멀리서도 눈에 띄어야 하니까.

무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르누보는 ‘새로운 미술’을 뜻한다. 19세기 말, 산업화가 세상을 빠르게 바꿨다. 대량 생산을 시작하자 물건은 차갑고 획일적으로 변해갔다. 이에 대한 반발이 아르누보였다. 아르누보는 직선 대신 곡선을, 기계적 구조 대신 자연의 리듬을 선호했다. 건축에서는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설계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가, 회화에서는 금빛 장식과 패턴으로 화면을 뒤덮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이 흐름을 대표한다. 무하는 그 장식적 감각을 거리의 포스터로 확장했다.
박물관은 사진 촬영을 제한했다. 카메라를 꺼내지도 못한 나는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는 대신 작품을 내 눈으로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찍어낸 이미지는 디지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주었다. 보정한 파일에 길든 눈 때문이었을까? 원본 포스터의 색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차분했다. 한 톤 낮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는 ‘내가 알던 그 색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파리의 벽을 자신의 작품으로 뒤덮기 전까지 무하는 평범한 젊은 예술가였다. 1860년 모라바(Moravia)에서 태어난 그는 성악가를 꿈꾸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 입학에도 떨어졌다. 1879년 그는 비엔나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하며 틈틈이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연습하며 그렇게 천천히 실력을 쌓았다.
그러다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 뮌헨과 파리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꿈 같은 유학 생활도 잠시, 갑자기 후원이 끊어졌다. 젊은 예술가 지망생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삽화와 광고 이미지 제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꿈을 잠시 접고 내린 그 선택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결정적 순간은 무하가 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1844~1923)의 연극 포스터를 맡게 되면서 찾아왔다. 1894년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날이었다. 파리의 유명한 배우 베르나르가 연극 ‘지스몽다(Gismonda)’의 새 포스터를 급하게 제작하려고 했다.
당시 인쇄소에서 교정 작업을 돕던 무하는 휴가 중인 다른 디자이너를 대신해서 일러스트를 맡았다. 무하는 높이가 2미터도 넘는 대형 석판화로 포스터를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비잔틴 귀족 의상을 입은 사라 베르나르가 전신으로 서 있다. 머리에는 난초 장식을 쓰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실물에 가까운 포스터의 크기와 길게 뻗은 우아한 화면 구성은 당시의 관습적인 극장 광고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남겼다. 이 디자인이 화제가 되면서 무하는 스타 작가 반열에 올랐다.

프라하에는 무하 박물관이 두 곳이나 존재한다. 한 곳은 오늘 소개하는 판스카 거리의 무하 박물관이다. 다른 한 곳은 2024년에 새롭게 문을 연 사바린 궁전(Savarin Palace)의 전시 공간이다.
두 공간은 같은 작가를 다루지만 방향이 살짝 다르다. 판스카 거리의 전시는 파리 시기의 상업 포스터와 장식적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둔다. 베르나르를 위한 포스터 시리즈 또한 주요 작품으로 소개하면서 상업과 예술이 겹쳐지는 무하의 작업 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사바린 궁의 공간은 생애를 폭넓게 조명하고 대형 프로젝트까지 아우른다. 무하를 ‘포스터 작가’에 머물지 않은 인물로 조명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상업적 목적을 위해 제작한 포스터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샴페인이나 담배를 광고하기 위해 그린 이미지는 덜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순수 미술’을 하는 작가 역시 그림을 사랑하는 구매자가 있어야 꿈을 이어갈 수 있다.
예술과 판매는 완전히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어렵다. 무하의 포스터는 ‘상업 이미지’라고 낮춰 부르기에는 깊이가 있다. 그의 작품은 파리의 벽을 장식한 채 시선을 붙잡으며 도시의 취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광고라는 형식 안에서 새로운 장식 언어를 실험했다. 그렇게 거리에서 소비되던 이미지는 시간이 흐르며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하의 작업은 상업과 예술 사이에 선을 긋지 않고 그 경계를 부드럽게 흐려놓은 것이었다.
김선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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