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발 21세기 배당’ 장밋빛 미래… 인간자립 꺾는 디스토피아 지름길[월드 타이드, 사상의 썰물과 밀물]
샘 올트먼, 저소득층에 월 1000달러씩 지급 실험
수혜자들 근로소득 줄고 저축 안해 빚만 되레 증가
분배, 생계 압박서 벗어나 인간의 창의성 키운다?
‘재정적 의존도’ 높이고…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

2024년 7월 전 세계 테크업계·경제학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챗GPT 창시자이자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를 열어젖힌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후원한 역대 최대 규모의 ‘보편적 기본소득(UBI·Universal Basic Income)’ 실험 결과가 전격 공개됐다. 비영리 단체 오픈리서치가 미국 일리노이·텍사스주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1000명에게 2020년 10월부터 3년간 매달 1000달러를 조건 없이 지급한 이 실험은 단순한 실효성 파악 수준에서 나아가 AI 시대 인간의 생존을 좌우할 ‘검증 모델’로 추앙받았다.
결과는 냉혹했다. 가외 소득이 늘어난 만큼 재산이 증가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축이 좀 늘긴 했지만, 부채가 대폭 증가해 순자산은 되레 감소했다. 소비는 주택 매입이나 저축, 교육비와 같이 미래를 위한 투자에 쓰이기보다는 자동차 대출 할부 상환·식료품·월세·교통비 등에 집중됐다. 또 주당 근로시간이 1.3시간 줄어들면서 연간 근로소득도 쪼그라들었다. 특히 지급이 중단된 직후 수혜자들의 경제적 자립 능력은 실험 전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공돈을 줬더니 저축은 안 하고, 빚을 늘리고, 일까지 덜한 셈이다.
올트먼 CEO는 그간 각종 콘퍼런스·인터뷰 등을 통해 “AI가 창출한 천문학적인 부를 시민들에게 재분배해 인간이 생계 압박에서 벗어나 더 창의적인 일에 몰두하게 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번 실험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기본소득을 신봉하는 올트먼 CEO가 자신의 사고 오류를 직접 증명한 ‘자충수’가 됐다.
올트먼 CEO의 사상적 기반은 18세기 후반 미국 정치인 토머스 페인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1789년 페인은 당시 지주들의 토지세를 재원 삼아 모든 국민에게 21세가 되면 15파운드를 지급하고, 50세가 된 이들에겐 평생 매년 10파운드를 주자는 혁명적 발상을 내놨다. 이후 기본소득은 많은 사상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영국 사회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저서 ‘기본소득: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노동 소득이 아닌 자산(지대) 추구형으로 변질했음을 지적하며 ‘공통 자산의 수익 환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거대 테크 기업이 활용하는 데이터·알고리즘은 인류가 수 세기 동안 축적한 ‘공통 자산’이다. 여기서 발생한 막대한 수익은 시민들에게 반드시 되돌아가야 하는 ‘사회적 배당’에 해당하고, 궁극적으로 생계 압박에서 해방된 인간은 보다 창의적인 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일본의 경제학자 이노우에 도모히로는 저서 ‘모두를 위한 분배: AI 시대의 기본소득’을 통해 한층 더 거시적인 위기 상황을 경고하고 있다. 이노우에는 인간의 노동력이 거의 필요 없는 수준의 ‘순수 기계화 경제’가 도래하면 생산성은 폭발하지만, 임금을 받는 소득자가 사라져 시장에서 물건을 살 사람이 없는 자본주의의 내적 붕괴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이 때문에 기본소득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요 관리 정책’으로 소환됐다.
다만 막대한 사재를 들인 올트먼 CEO의 현장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장밋빛 전망이 현실 경제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금 지급이 인간을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존재로 만들 것이라는 가설은 빗나갔고, 수혜자를 혁신가로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정적 의존’의 늪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경고가 수치로 입증된 셈이다. 21세기에 이른바 ‘디지털 배당’으로 부활한 240년 전 페인의 구상이 인간의 자립 의지를 꺾는 역효과로 귀결됐다는 지적이다.
천문학적인 재원 마련을 위해 흔히 거론되는 방안은 ‘디지털세’와 ‘로봇세’다. AI 학습의 토양이 된 데이터를 ‘공유 자산’으로 간주해 세금을 물리거나,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한 로봇에게 소득세를 징수해 그 과실을 나누겠다는 구상이다. 이를 반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국경 없는 AI 기반 경제에서 특정 국가가 독자적으로 고율의 징벌적 과세를 도입할 경우, 기업들의 ‘기술 엑소더스’를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오픈리서치의 검증 결과를 소개하면서 “올트먼이 돈을 댄 실험과 달리, 기본소득을 정책으로 집행하려면 적잖은 세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제언했다.
물론 오픈리서치의 실험은 AI 기술 발전에 따른 완전한 ‘노동 종말의 시대’를 전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섣불리 미래를 예측하는 데 한계가 있다. 다만 기본소득 담론 찬성론자들과 같이 향후 겨우 먹고살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 누구의 주머니에서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지에 대한 고민에만 집중하면 확증 편향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현존하는 인물 중 가장 혁신적인 기업가로 평가받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AI 발전이 가져올 미래상과 관련해 ‘보편적 고소득(UHI·Universal High Income)’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한다. 최근 미국 기업가 피터 디아만디스의 팟캐스트 ‘문샷’에 출연한 그는 ‘(AI 발전이) 세금을 걷어 재분배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으냐’는 질의에 “그렇다”고 단언했다. AI와 로봇이 생산성을 무한히 끌어올리면 상품·서비스의 한계 비용이 0에 수렴하고, ‘부족이 아닌 풍요가 기본값인 사회’가 가능해진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극도로 낮아지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해 누구나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머스크 CEO의 주장은 ‘기본소득이 AI 시대의 연착륙을 보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기술 낙관주의에 근거한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해 현실 가능성이 극히 낮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기본소득이라는 단 하나의 정답지에 매몰된 이들에게 날카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특이점 안에 들어와 있다. 이 과정은 험난할 거고 나도 정답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고, 아이디어는 열려 있다.”
■ 기본소득 논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애스모글루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 ‘권력과 진보’에서 기술 혁신의 과실을 나누는 방식에 따라 사회의 운명이 갈린다고 진단했다. 그는 인공지능(AI) 시대에 특히 분배 방식을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방대한 데이터, 첨단 반도체 등이 필수인 만큼 태생적으로 거대 기업 몇 곳의 독과점으로 수렴되기 쉽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그중 하나로 거론되는 기본소득에 대해선 “패배주의적 내러티브”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소수가 부를 독점할 수 있는 세상에서 권력이 단지 생존을 위해 ‘밥’만 배분하는 것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다.
AI 시대 안전망으로 거론된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글로벌 학계·테크업계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기본소득 일변도’를 고집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기본사회 구상은 그의 ‘기본소득 스승’으로 알려진 강남훈 기본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사상적 기반에 뿌리를 둔 것으로 평가받는다. 강 부위원장의 저서 ‘기본소득의 경제학’ 등에 따르면 기본소득 재원은 ‘공유부 배당’ 논리에 따라 토지 등 공유자원에서 발생한 이익을 토대로 한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산업 공동화가 심화되면서 인재와 알고리즘, 자본이 동시에 이탈하는 구조적 고립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편적 기본소득
재산·소득·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지급하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말한다. 인공지능(AI)이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 실질적인 생존권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도입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다만 노동 의욕 저하, 불투명한 재원 마련 방안 등이 정책적 한계로 지적된다.
보편적 고소득
AI·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 창출된 막대한 부를 모든 인류가 누리고 높은 수준의 삶을 향유하는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풍요로운 자원을 배당받아 경제적 제약 없이 자아를 실현하는 미래 사회 경제 모델로 꼽히지만, 다소 기술 낙관론에 치우친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있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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