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장자’라 불렸던 사람… 당신의 품격 잊지 않겠습니다[그립습니다]

2026. 3. 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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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철학자 이현구 (1957∼2025)
이현구(왼쪽) 박사와 마주 앉아 학문과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난해 여름, 비가 유독 많이 내리던 날, 이현구(李賢九) 박사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빗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 그날의 비는 유난히 깊게 느껴졌습니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비어버린 듯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안의 시간은 멈춘 듯했습니다.

이현구 박사는 도가철학자(道家哲學者)이자 과학철학자(科學哲學者)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문적 이름만으론 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학자입니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철학을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삶에서 철학은 책 속의 문장을 넘어 그야말로 호흡이었고 삶의 태도 그 자체였습니다.

한때 그는 성균관대가 낳은 이른바 ‘천재 철학자’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는 ‘동양철학에세이’(공저)는 많은 이들에게 동양 사유(思惟)의 깊이를 처음으로 열어 보인 책입니다. 그리고 ‘천재’란 말도 사실 그를 설명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한 이름입니다. 그는 재능 이전에 사유의 품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현구 박사는 철학의 여러 분과를 자유롭게 넘나든 인사였습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자연철학과 과학철학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럼에도 늘 질문의 중심은 잃지 않았습니다. 학문적 영역이 넓어질수록 그의 사유는 오히려 더 단순하고 깊어졌습니다. 결국 그의 철학은 항상 ‘삶과 존재’라는 근원적인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종종 그를 ‘살아 있는 장자(莊子)’로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를 아는 이라면 모두 공감할 만큼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는 장자를 해석하는 학자가 아닌 장자의 세계를 살다 간 사람입니다. 세상의 번잡함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자연의 고요한 질서를 잊지 않았습니다.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떤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많은 이들은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기 바쁩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삶의 방식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의 경쟁과 소란 속에서도 그는 늘 한 발 물러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리 속에서 ‘사유의 자유와 삶의 여백’을 지켜냈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연철학자의 삶 그대로였습니다. 동시에 과학철학에서도 그의 사유는 매우 독특했습니다. 과학의 언어가 정밀할수록 그는 오히려 그 속에서 더 깊은 질문을 찾았습니다. 말하자면 과학과 철학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즉, 두 학문 세계가 만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한편 그의 강의나 글에도 질문은 담겨 있었습니다. 어떤 이론도 질문보다 앞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생각하는 태도를 일깨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질문을 남기는 사람이고,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이현구 박사를 논할 때 빠뜨리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학문과 삶이 둘이 아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문을 사랑했지만 사람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후학들이 찾아가면 언제나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과 생각을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긴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은 금방 전해집니다. ‘살아 있는 장자’로 불리는 사람답게 소통의 왕이었습니다. 그와 함께라면 갈등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때론 말 대신 눈빛으로 격려를 건네곤 했습니다. 그 눈빛 속엔 언제나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갑자기 지구촌에서도 한국에서 잠시 머물다 간 한 철학자의 삶을 소환하는 게 아닙니다. 혼란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 하나의 세계가 사라졌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 속에 담겨 있던 사유의 풍경과 정신의 깊이가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조용하지만 깊은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이제 살아 있는 장자는 우리 곁을 떠나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울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숲이 한동안 흔들리듯 그의 사유는 오래도록 시대의 구성원들 마음속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잠시 머물다 사라진 철학자가 아닌 영원히 또 고요한 질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현구 박사님. 이제 혼탁한 세상의 소리를 내려놓고 평생 사랑했던 자연 속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어떤 인위도 없는 자리’에서 완전한 자연과 더불어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사유의 깊이와 삶의 품격을, 당신이 들려준 질문의 빛을, 당신이 남겨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김해영(철학박사·문화정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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