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 인상의 주범은…정유사? 주유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 사후정산제 제대로 작용하면 정유사 주유소 윈윈, 리스크헤지 역할 문제는 유가급등기 부작용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여파로 국내 주유소 기름값이 치솟았습니다. 상승세가 둔화되긴 했지만 휘발유, 경유 등은 여전히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이번주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전방위적인 기름값 누르기에 나선 모습입니다.
지난 일주일여간 가장 이해가 안됐던 건 기름값 인상 속도였습니다. 비싸진 중동 원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국내 기름값이 먼저 올랐기 때문입니다. 수요가 몰리면서 가격이 어느 정도 '선반영' 될 수 있겠으나 이를 감안해도 과한 상승폭입니다.
이번 기름값 인상을 두고 주유소와 정유사 간 '네 탓' 공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유사는 소비자 판매가격 결정권은 주유소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유소는 가격 상승의 주된 원인이 정유사의 공급가격 인상이라는 입장입니다. 과연 이번 기름값 인상의 주범은 누구일까요. 이번 이슈체크에서 하나씩 짚어봅니다.
■ 비싼 원유 도착도 안했는데… 기름값 먼저 뛴 이유
지난 10일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리터당 각각 1903원, 1931원입니다. 이란 전쟁 직후(2월28일)와 비교하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10원, 경유는 333원 상승했습니다.
정부는 이 같이 가파른 기름값 인상이 비상식적이라고 보는 듯합니다. 비싸진 중동 원유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으므로 기름값이 오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통상 중동에서 싣고 온 원유가 정제를 거쳐 주유소에 공급되는데는 3주 이상 소요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과거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한 기름으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게 정부의 인식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주유소의 기름값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정유사 말대로 최종적인 소비자 판매가격 결정권은 주유소에게 있습니다. 정유사가 직영점 형태로 주유소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로 높지 않습니다. 사실상 개인 사업자들이 각각 상황에 맞게 기름값을 정하고 직영점이 그 가격을 따라가는 형태이고요.
물론 주유소 역시 무작정 가격을 정하는 건 아닙니다.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로부터 공급받는 기름값에 적정 마진을 붙여 파는 식이죠.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기름값은 싱가포르 석유제품(휘발유, 경유)의 '현물시장 가격'에 적정 마진(운송비, 환율, 관세 등을 고려)을 붙여 정합니다. 원유가격이 아니라 '제품가격'에 연동됩니다.
따라서 국제 원유가격이 오르거나 내려도 현물시장 제품가격에 변동이 없으면 주유소 공급가격 역시 별 변동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 원유가격이 오르면서 석유류 제품가격 또한 크게 상승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국내 기름값 인상의 주범은 주유소에게 있을까요. 아니면 정유사에 있을까요. 우선 주유소가 가격을 어떻게 결정짓는지 그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평소라면 주변 주유소보다 가격을 최대한 저렴하게 낮추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많은 고객들이 올 테니까요. 이 시기 주유소 간 경쟁은 '얼마나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고객들에게 파느냐' 싸움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유가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에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집니다. 주유소에는 기름을 저장하는 대용량 저장 탱크가 있습니다. 저장 탱크 1기당 5만 리터(250개 드럼 분량) 분량으로 1개 주유소 당 보통 4~6기를 보유 중입니다.
1개의 저장탱크에 휘발유를 가득 채우는 데 7000만원이 들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리터 당 1400원인 셈이죠. 주유소 사장님은 리터당 1500원 정도에 팔아 총 차익을 500만원 남길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터졌습니다. 리터당 1800원으로 가격이 뛴다면 2000만원의 차익을 남길 수 있고요, 2000원으로 오르면 3000만원의 차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가격이 당분간 빠르게 큰 폭으로 상승할 것이 예상된다면 주유소 사장님은 싸게 매입해 놓은 기름을 최대한 늦게 팔고 싶은 동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가격이 '지속적으로' 뛸 것이 예상되는 시기에 주유소 간 경쟁은 비싼 가격을 매겨 최대한 소비자들에게 '안 파는' 양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아래 그림처럼 A 주유소의 3월 1일 가격이 1700원, B 주유소 가격이 1690원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소비자는 기름값이 더 싼 B주유소로 몰려갑니다.
B 주유소 입장에선 손해 아닌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앞으로 기름값이 더 오르면 이보다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장 탱크에 있는 기름이 빨리 소진되면 비싸진 기름을 사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B 주유소는 다음날 가격을 더 올려 소비자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저장탱크 지키기에 나섭니다. A 주유소 역시 마찬가지 전략을 짤 겁니다.
이는 치열한 경쟁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 단순히 '폭리'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다는 게 주유소 업계의 입장입니다. 뒤이어 매입할 비싼 기름을 들여오기 전에 저렴한 기름으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지, 담합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주유소 한 관계자는 "평시에는 가격인하 전쟁이라면 지금 같은 시기에는 가격인상 전쟁인 셈"이라며 "이것이 비싼 원유가 도입되기 전 기름값이 먼저 오르는 이유 중 하나인데, '폭리'라는 관점보다 보유한 기름으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주유소 간의 경쟁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 관행으로 굳어진 특이한 사후정산 구조가 기름값을 끌어올린다?
과거에 매입한 기름은 언젠가 소진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가격을 올려 재고 소진 속도를 늦추더라도 주유소는 언젠가 새 기름을 매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유사와 주유소간 관행적 정산 구조가 기름값을 더 끌어올린다는 지적이 일고 있습니다. 만악의 근원이 정산 제도에 있다는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그럴까요?
정유사와 주유소는 보통 '사후정산제도'로 기름거래를 합니다. 선택 사항이지만 많은 주유소가 이 방식으로 기름값을 정산받고 있죠. 주유소는 매입 시점에 정유사가 잠정적으로 정한 가격(잠정매입원가)으로 기름값을 먼저 지불하고, 나중에 확정가격으로 추가정산을 합니다. 정산 시점은 주로 일주일 또는 한달 단위입니다.
주유소가 1만리터 휘발유를 산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정유사가 잠정가격으로 1500만원(1리터당 1500원)을 제시하면 주유소는 매입 시점에 이 금액을 정유사에 우선 지급합니다. 그리고 정산 시점에 정해진 확정 가격이 1300만원이었다면 정유사는 주유소에 200만원을 돌려줍니다. 반대로 1700만원이었다면 주유소가 정유사에 200만원을 추가 지급합니다.
기름값을 사후정산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공산품과 달리 원유가격과 석유제품(휘발유, 경유 등)가격은 늘 변동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가격과 오늘 가격이 다를 수도 있는 거죠. 이 변동성을 최소화하고자 사후정산제를 한다는 게 정유업계의 설명입니다.
사후정산제 하에서 주유소는 기름을 공급받는 시점에는 매입가격을 정확하게 모릅니다. 기름을 일단 산 뒤 사후에 정산을 받기 때문입니다. 현재 같은 유가 상승기에 주유소로서는 앞으로 정유사의 공급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 '얼마나' 오를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거죠.
이 불확실성이 주유소가 당장 가격을 올릴 수 밖에 없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잠정 매입원가로 1리터당 1500원에 매입해 소비자에게 1600원에 기름을 팔았는데 향후 정산 시점에 1700원으로 최종 정산이 발생하면 리터당 100원 손실이 발생합니다. 주유소 입장에서는 아예 가격을 확 올려 1800원에 기름을 파는 게 안전한 셈입니다.
김태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정책연구실장은 "주유소 입장에서 정산 시점에 정유사로부터 받는 정산금이 줄어들거나 혹은 정유사에 오히려 정산을 해줘야 한다는 불안감에 가격을 미리 올리는 것"이라며 "사후정산제도는 지금처럼 유가가 한 방향으로 흐르면 불확실성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후정산제도는 과거 문제가 됐던 적이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9년 사후정산이 불공정 거래의 사례라며 4대 정유사에 시정명령을 내리기도 했죠. 사후정산제도로주유소가 정확한 매입 가격을 알 수 없어 기름값을 책정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주유소가 여러가지 불이익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었습니다.
공정위 조치를 수용한 다른 정유사와 달리 에쓰오일은 시정명령이 불합리하다며 법원에 판단을 요구합니다. 법원은 에쓰오일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정유사가 우월적 지위에 있긴 하지만 사후정산시 거의 대부분 주유소가 정산금을 토해내기 보다는 돌려받았던 것으로 보이고, 이 제도를 이를 이용해 정유사가 주유소에 구입강제나 판매목표강제 등을 강요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사후정산제도가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처럼 예외적인 상황에는 가격을 끌어올리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윈윈(Win-Win)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후정산제도는 가격 변동성이 큰 석유 시장에서 가격 변동 리스크를 정유사와 주유소 양쪽이 나눠 가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기름 가격이 큰 변동성 없이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주유소는 싸게 매입하여 저장하고 있던 탱크의 기름을 오른 가격으로 판매하게 되므로 상당한 마진을 얻을 겁니다. 이런 경우 정산 시점에 주유소가 돌려받는 정산 금액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일정 부분 이익을 챙겼으므로 나쁘지 않은 상황입니다. 정유사 입장에서도 정산시점에 지급하는 정산 금액이 줄어들기 때문에 부담이 완화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번엔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보겠습니다. 기름값 하락 국면에는 주유소는 비싸게 매입하여 저장하고 있던 탱크의 기름을 하락한 가격으로 판매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후정산 과정에서 더 많은 금액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손해가 나더라도 정산을 통해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거죠. 결국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과 이익을 정유사와 주유소가 일정 부분 나눠 갖는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후정산제도는 이처럼 리스크 헤지의 관점으로 보면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유가 급변기 특히 급등기에 주유소 판매가격의 단기급등을 부채질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이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