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정조의 애민정신 깃든 수원 만석공원
![만석공원의 흰뺨검둥오리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2514meol.jpg)
(수원=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흰뺨검둥오리 두 마리가 뒤뚱뒤뚱 눈밭을 걸어간다. 백지 위에 찍히는 선명한 발자국. 꿈결 같은 겨우살이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걸까.
억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백로 한 마리도 얕은 물길을 미끄러지듯 스쳐 간다.
왕벚나무가 둘러친 호반. 눈 덮인 호수와 겨울 철새들.
정조가 1795년 관개시설로 축조했다는 수원 만석거(萬石渠)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은 수원 만석공원 한가운데 자리한 이 호수는 2017년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만석공원 전경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2727wipg.jpg)
정조의 스마트 농법
정조는 수원화성을 지으면서 가뭄 때면 황무지가 되는 주변 지역에 4개의 저수지를 축조했다.
성을 중심으로 북쪽에 만석거, 남쪽에 만년제, 서쪽에 축만제를 만들었다. 수원시 지동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동쪽 저수지는 현재 흔적이 없다.
이중 만석거와 축만제 두 곳은 아직 물이 보존돼 있다.
정조는 저수지를 만든 뒤 국영 농장인 대유둔(大有屯)을 설치해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은 결과, 쌀 1만 석이 더 생산됐다고 한다. 그래서 지은 저수지 이름이 만석거다.
당시 대유둔에서 생산된 쌀들은 수원화성을 유지하는 비용과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는 기금으로 쓰였다.
![만석공원 저수지의 나무데크길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2956stux.jpg)
대유둔은 당시로선 가장 앞선 농법을 시험하던 장소였다.
정조는 직접 농사짓는 도구들을 점검하고 가뭄에 강한 품종을 심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저수지에는 최신식 수문과 수갑을 설치했고, 저수지의 물을 함부로 빼 쓰지 못하게 했으며, 물이 넘치면 수문을 열고, 가물 때는 물을 철저히 배분하는 등 관리 매뉴얼도 만들어 시행했다고 한다.
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저수지가 넘칠 것 같으면 물이 자동으로 흘러 나가게 한 안전장치로 여수토(餘水吐)라는 수로를 만들었다.
당시 저수지에는 흰 연꽃을 많이 심었고 주변 제방에는 느티나무들을 배치했다. 연꽃은 수질을 정화하고 느티나무의 뿌리는 둑을 지탱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수원에 가뭄이 들어도 만석거 주변 농민들은 흉년을 면할 수 있었고, 이는 정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이어졌다.
![수질 정화한 물이 유입된 만석공원 저수지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3190xjcq.jpg)
이후에도 만석거는 백성들에게 더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겨울에 저수지 물이 얼면 얼음을 잘라내 인근 얼음 창고에 저장해 여름철 수산물 보관에 사용했다.
1970∼1980년대에는 수원 시민들의 소풍 장소이자 천연 스케이트장이었다.
억새와 철새
며칠 전 내린 눈이 얼어붙은 호수를 눈부신 설원으로 만들었다. 딴딴해 보이는 얼음 위를 걸어보고 싶은 위험한 충동을 억눌렀다.
조금은 풀린 날씨만 믿고 1.3㎞의 둘레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시간을 거스르고 싶은 걸까. 늘 시계 반대 방향이다.
![만석공원을 비행하는 흰뺨검둥오리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3497kikp.jpg)
호수를 빙 둘러친 모든 나무가 같은 수종이다. 왕벚나무다.
찬 공기, 찬 바람에 잔뜩 웅크린 나무들은 불과 두 달 후면 펼쳐질 찬란한 개화 이벤트를 남몰래 준비하는 것 같다. 벚꽃이 만개한 만석공원은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길을 걸으면서 눈길은 계속 호숫가로 끌려가고 언제나 그곳엔 은빛 억새와 철새들이 연인처럼 어우러져 있다.
여름 철새인 백로, 겨울 철새인 물닭과 흰뺨검둥오리는 제각기 정반대 타향에서 날아와 한치의 적대감도 없이 어떻게 이런 평화를 만드는 건지.
걷다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보이면 반가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뿌리의 견고함으로 둑을 지켜낸 공로가 대견했다.
![만석공원에서 운동하는 시민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3715mqmq.jpg)
아름다운 둘레길 풍광의 중심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다.
저 멀리 이름을 알기 어려운 나무들과 억새가 호젓이 물에 떠 있어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공간. 오로지 새들만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곳. 둘레길 어디서 봐도 호수가 빈틈 없이 느껴지는 건 섬 때문이었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둘레길의 절반쯤 돌면 오른쪽 공원 끝자락에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수원시립만석전시관(옛 수원미술전시관)이다. 수원화성을 형상화한 외관이 눈길을 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예술공간이 공원 안에 있으니 주변 시민들은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수원시립만석전시관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3971xecw.jpg)
호수 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2층짜리 누각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여의루'(如意樓)다.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이뤄진다'는 의미라니, 후일 공원이 생기면서 지어진 누각이지만 백성을 위하는 정조의 마음을 반영한 작명일 것이다.
1797년 8월 정조 행차 때 지은 시 한 수가 '화성성역의궤'에 전한다.
다락의 망루가 문득 솟아 오르니
산과 물이 갑자기 새로워지는구나
(중략)
거리거리마다 생업을 즐거워하는 백성들이네
밭의 등급은 으뜸 중의 으뜸인데
도랑 뚫어 물대는 것 내년 봄을 위함일세
![만석공원 여의교 위에 조선 정조대왕 능행차 행렬을 표현한 조형물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4219yedw.jpg)
누각에서 물 쪽을 바라보니 바로 앞에 꽤 큰 배롱나무들이 진을 치고 있다.
7월 이후엔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배롱나무꽃의 선연한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만끽하겠지만, 그리움에 여름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둘레길의 마지막 모퉁이 못 미쳐 호수의 남쪽에 영화정(迎華亭)이 있다. 8칸에 팔작집 형태로 정조 때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만석거를 조망하기 좋은 낮은 언덕 위에 있었지만, 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원래 자리에서 200m가량 이동해 복원됐다. 당시에는 영화정에서 바라보는 만석거가 가장 아름다웠을 것이다.
만석거 주변에서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이루는 풍경을 '석거황운'(石渠黃雲)이라 하여 수원 추팔경 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영화정 [사진/정동헌 기자] 만서](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4526onwo.jpg)
영화정 동쪽 문 정면에 회화나무 두 그루가 호위병처럼 서 있고 그 옆으로 키 큰 소나무가, 다시 그 옆으로 길쭉길쭉한 메타세쿼이아가 공원에서 보기 드물게 연이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눈을 감고 숲의 소리를 들어본다. 맹꽁이와 붉은귀거북의 서식지라는데 맹꽁이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손끝을 수피에 올려놓고 겨울나무들이 품에 숨긴 생명의 호흡을 느껴본다. 아직은 한겨울. 공원을 나서며 황지우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의 한 구절을 찾아 읽었다.
(전략)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만석공원 맹꽁이 생태학습장 [사진/정동헌 기자]](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1/yonhap/20260311080144781gnrw.jpg)
※ 참고 자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 '만석거'(萬石渠)
2. 수원특례시 홈페이지 중 '만석공원과 만석거'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3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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