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어린 시절,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가
뇌가 실제로 '아픔'으로 처리하는 경험
아이들의 보호가 고립이 되어서는 안돼

얼마 전 버스에서 우연히 한 대화를 들었다. "애가 폰 게임만 할까 봐 키즈폰으로 바꿔줬어." 옆자리에 앉은 다른 아주머니가 놀란 듯 되묻는다. "그런 게 있어? 나도 좀 알려줘." 짧은 대화였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도 오래된 나의 기억을 불쑥 건드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남학생들 사이에는 디지몬 다마고치가 거의 필수품처럼 여겨졌다. 쉬는 시간이면 작은 기계를 손에 쥔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디지몬을 자랑하고, 진화 과정을 비교했다. 나는 디지몬의 이름과 진화 단계를 줄줄 외우고 있었지만, 정작 기계는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학업에 소홀해질까 염려해 선뜻 사주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디지몬에 대해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다마고치가 없는 아이는 그 세계에 속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용돈을 모아 다마고치를 샀다. 드디어 나도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막상 교실에 들고 갔을 때 친구들의 관심사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이미 막이 내린 뒤에 도착한 사람처럼 나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교실 안에 있었지만, 그 장면에는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었다.
2003년 미국 UCLA의 나오미 아이젠버거 교수는 '사이버볼'이라는 온라인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는 화면 속에서 세 명이 함께 공을 주고받는 게임을 한다고 믿는다. 처음에는 공이 고르게 오가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 명이 서로에게만 공을 던지고 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공이 전달되지 않는다. 실험은 몇 분 남짓 진행됐을 뿐이지만, 그동안 배제된 참가자의 뇌에서는 신체적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전대상피질이 함께 반응했다. 사회적 배제는 단순히 기분이 상하는 일이 아니라, 뇌가 실제 '아픔'으로 처리하는 경험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다마고치를 들고 교실에 섰던 그날의 어색함은 어쩌면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라, 실제로 아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유행을 놓친 아이가 아니라, 잠시나마 공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제외된 아이였던 셈이다. 아이에게 유행하는 물건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관계의 입장권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고3이 되었을 때,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수능이 100일 남은 어느 밤, PMP에 '디지몬 어드벤처'를 넣어두고 몰래 보기 시작했다. 화면 속 장면과 대사들은 여전히 익숙하고 반가웠다. 하지만 끝까지 다 보고 나서도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분명 같은 장면이었는데, 그때의 공기와 웃음은 끝내 따라오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독립을 하면서 게임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선후배들과 밤늦게까지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웃고 떠들었고, 마인크래프트에서는 함께 드래곤을 잡으며 환호했다. 돌이켜보면 게임의 승패보다 그 시간들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단순히 게임을 한 것이 아니라, 같은 순간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래서 버스에서 들은 키즈폰 이야기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스마트폰 속 각종 콘텐츠에 과도하게 노출될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디지털 기기의 과잉 사용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원하는 것이 콘텐츠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 콘텐츠를 매개로 형성되는 관계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기를 차단하는 일이 혹시 그 또래 집단에서의 '공'을 함께 주고받을 기회까지 막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디지몬을 두 번 가졌었다. 한 번은 너무 늦게, 한 번은 혼자서. 그리고 대학에 와서야 알았다. 우리가 진짜 원했던 것은 단순한 게임기나 화면 속 캐릭터가 아니라, 그 곁에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막고, 무엇을 남겨주려는 걸까. 보호는 필요하다. 그러나 보호가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안전하게 속할 수 있는 자리를 어떻게 마련해 줄 것인지, 어른들의 고민은 그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영환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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