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대표 33인 중 왜 선비는 단 한 명도 없었는가.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의 유림은 스스로를 향한 이 질문 앞에 섰다. 파리 장서사건은 바로 그 자성에서 비롯됐다.
산청 출신의 유학자 면우 곽종석(1846~1919). 그의 무기는 붓이었고, 그가 바친 것은 목숨이었다. 전국 137명 선비의 이름을 모아 2674자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했다. 일제의 방해와 강대국의 논리에 막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조선 유림이 처음으로 전국적 연대를 통해 세계를 상대로 펼친 독립운동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곽종석 선생 초상화
◇"민족 대표 33인 명단에 유림이 없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민족 대표 33인에는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의 이름이 올랐다. 그러나 500년 조선왕조의 학문과 사상을 이끌어 온 유림의 이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유림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선비들이 빠져 있었다. 종교계가 비밀리에 급박하게 추진한 탓도 있었고, 주요 지도자들이 경상도·충청 등지에 흩어져 있어 기밀을 유지하며 시간을 갖고 논의를 나누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민족의 위기 앞에서 선비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더 크고, 더 강력하고, 더 울림 있는 방식으로 독립의 의지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림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마침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면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기운이 돌았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서울에 모인 김창숙을 비롯한 선비들은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뜻을 모았다. 전국의 선비들을 하나로 묶으려면 누구나 인정하는 원로가 필요했다. 그 자리에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곽종석이 있었다.
김창숙은 스승 곽종석이 머물던 거창으로 달려갔다. 유림의 대표로 나서달라는 청이었다. 곽종석은 앞서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제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각국 공사관에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했었다. 이번에도 곽종석은 제자의 요청에 주저하지 않았다.
파리장서 원문, 국립한국문학관은 3.1절을 맞아 파리장서 원본을 최초 공개했다. 파리장서는 여러 문헌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지만, 원본이 공개된 적은 없다. 이번 자료 공개를 통해 그 실체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친필 원본 자료 공개를 계기로 파리장서의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제기된다.
산청 유림독립기념관 내부 전시
◇세계를 향한 조선 선비의 절규
유림의 거두인 곽종석이 전면에 나서자,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3·1운동 직후 일제의 감시망이 사방을 뒤덮은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었다. 밀정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은 즉각 체포로 이어졌다.
김창숙을 비롯한 곽종석의 제자들은 경상과 충청·대전 일대를 돌며 서명을 모으는 작업을 비밀리에 이어갔다. 누군가는 밤을 새워 연락문을 전달했고, 누군가는 일제의 눈을 피해 산길을 걸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전국에서 137명의 선비가 독립 청원서에 이름을 올렸다. 총 2674자로 쓰인 청원서는 곽종석의 친필로 작성됐다.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함께 자라나니, 혈기와 기운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똑같은 본연의 선함을 지니고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햇볕을 함께 쬐며 자라는 자연의 이치처럼, 인류 역시 서로의 생존과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인류애로 서두를 연 청원서는 곧이어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어진다.
"지난날의 조약(을사늑약 등)은 우리 백성의 뜻이 아니요, 칼날 아래에서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손발이 묶인 채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믿으며, 만약 독립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모두 죽을지언정 결코 일본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
"한국은 5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국이며, 현재의 식민 상태는 국제법상 무효이니 우리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게 해달라."
김창숙은 청원서를 품에 안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과 불문으로 번역해 전달했다. 임시정부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은 독립 청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려 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승전국 중심으로 짜인 국제 질서 속에서 약소민족의 독립 호소는 쉽게 외면당했고, 일제의 집요한 방해 공작까지 더해지며 조선의 독립 요구는 끝내 안건에도 오르지 못한 채 회의장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달랐다. 각자의 고을에서 개별적으로 의병 활동이나 학문을 닦던 선비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1925년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이어지며, 군자금 모집과 무장 독립 투쟁 지원 등 실질적인 항일 투쟁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파리 장서사건이 유림을 깨운 것이다.
산청 유림독립기념관 내부 전시물.
◇"나는 백성의 의무를 다한 것뿐이다"
곽종석은 1846년 산청에서 태어났다.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평생을 바친 학자로, 퇴계 이황의 깊은 학문과 남명 조식의 불굴의 실천 정신을 동시에 이어받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면우 선생은 퇴계의 학문을 따르면서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경의(敬義) 정신과 기상을 본받은, 당대 유학을 이끌었던 대학자였다"고 말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조병세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와 매국노 처단을 강력히 주장했던 그는, 말년에 거창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중 고종의 서거와 3·1운동 발발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섰다. 파리 장서사건에서 그는 유림의 정신적 지주이자 최종 결정권자로서 137인 중 가장 먼저 서명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속 비석은 거창군 가북면 다전리에 위치한 '면우선생다전기적비'다.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19년 4월 18일, 곽종석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74세의 노학자에게 가해진 고문은 잔혹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해 8월 24일, 곽종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부음이 전해지자, 전국의 선비들이 통곡하며 모여들었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는 그렇게 붓을 내려놓았다.
제자 김창숙은 훗날 스승을 가리켜 '천하의 선비'라 불렀다. 파리 장서사건을 이끌다 순국한 스승의 죽음은 유림 전체를 뒤흔들었고, 더욱 치열한 항일 투쟁의 불씨가 됐다.
정부는 1963년 곽종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늘날 산청에는 이동서당과 유림독립기념관이, 거창에는 다천서당과 곽종석 선생 유허지 및 전시관이 세워져 파리 장서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