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스페인, 이란 문제로 트럼프 대통령에 반기 드는 이유는
미국에 맞서 ‘민주주의 수호자’ 이미지 구축
트럼프 “무역 중단” 조치 가능성도 낮아
전쟁 반대·中 밀착 등 이례적 행보 유지
스페인 정부가 미국이 스페인 내 미군 기지를 이란 공습에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미국과 스페인 간 외교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이를 두고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의 정치적 셈법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공습 작전에 필수적인 군사 기지 사용을 불허한 스페인에 무역 중단이라는 초강수 조치를 시사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양자 회동 중인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를 앞에 두고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에게 “당장 스페인과 모든 무역 거래를 끊어버리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메르츠 총리는 국방비 증액을 거부하는 스페인에 “동맹 안보를 위한 기준을 맞춰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앞서 산체스 총리는 남부 광역자치주인 안달루시아의 로타 해군기지와 모론 공군기지를 이란 공습 작전에 활용하는 것을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두 기지는 미국과 스페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전략 거점으로, 미국은 대(對)이란 작전 수행을 위해 이 기지들에 대한 활용을 요구했으나 산체스 총리는 “(군사 작전은) 국제법을 위반한 위험천만한 개입”이라며 이를 완강히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산체스 총리가 강경한 대응을 이어가는 배경에는 스페인 국내 정치 상황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관측된다. 산체스 총리가 이끌고 있는 집권 사회노동당이 잇따른 성희롱 사건으로 사임 혹은 해임되면서 지지율 하락에 시름하고 있으며, 산체스 총리 본인 또한 부패 의혹이 제기되면서 퇴진과 조기 총선에 대한 압박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스페인에서는 산체스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진 바 있다. 지난 12월 수도 마드리드 내 운집한 시위 인원은 여당 추산 4만명, 제1야당이자 시위 주도 세력인 국민당 추산 8만명에 이르렀다. 산체스 총리의 최측근인 호세 루이스 아발로스 전 교통장관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정부 계약 중 뒷돈을 받은 혐의로 직전에 구속됐으며, 총리의 부인과 형 또한 공금 횡령과 부패 사건 연루 건으로 기소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체스 총리는 미국과의 갈등을 통해 스페인 주권과 사회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이번 미국의 이란 공습을 2003년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에 비유하면서 당시 스페인 반전 시위를 휩쓸었던 “전쟁 반대(No War)” 구호를 재소환했다. 당시 전쟁을 지지했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 스페인 총리에 맞서 반전을 외쳤던 국민들을 결집, 미국에 맞서 국가 주권을 수호하려는 행보로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체스 총리는 앞서 국방비 증액 등 다른 정책 영역에 있어서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해 왔다. 예컨대 스페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설정한 국방비 목표(GDP 대비 5%)를 거부, “5%는 우리의 복지 체계나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다”며 2.1% 선의 지출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공고히 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페인이 안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며 공세를 이어갔음에도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반(反)이민 정책과 대외 정책에도 산체스 총리는 대립각을 세운 바 있다. 그는 올해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민 단속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 스페인의 불법 체류자 합법화 정책을 대비시키는가 하면 미국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축출 작전을 감행한 데 대해 “위험한 선례”라며 반대 입장을 못 박기도 했다.
외교 전략에서도 산체스 총리는 중국과 밀착하며 독자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스페인은 자동차 제조와 재생에너지 등 분야에서 중국 투자 유치를 확대,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노선을 채택해 왔으며 산체스 총리는 “EU가 대중(對中) 관계에서 미국 입장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독자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엣가시가 된 트럼프 대통령은 스페인에 무역 중단 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이러한 조치가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양국 무역 교류가 중단되면 오히려 스페인 상대 무역 흑자국인 미국이 손해를 볼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양국 교역액은 약 470억달러로, 미국이 약 48억달러 규모의 무역수지 흑자를 본 것으로 집계된다.
미국이 스페인에 대해 별도로 독자적 제재를 가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과거 트럼프 대통령은 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발동, 특정 국가 상품에 포괄적 관세를 부과했으나 미국 대법원은 지난달 이를 근거로 한 관세 부과 권한에 제동을 건 바 있다. 이외에도 특정 산업에 관세를 부과하는 다른 법률을 활용할 수는 있으나, EU 단일 시장 체제에서 스페인을 별도로 제재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 실린다.
스페인에 대한 제재를 현실화하더라도 ‘무역 바주카포’로 불리는 유럽 차원의 통상위협대응조치(ACI)에 걸려 역풍을 입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ACI는 EU나 회원국을 경제적으로 위협하는 제3국에 대해 서비스, 외국인 직접 투자 등 광범위한 무역 제한을 가능케 하는 제도다. 앞서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에 대한 위협은 곧 EU 전체에 대한 위협”이라며 스페인 지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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