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 중 영빈관 사신 접대, 승천포 고려천도공원 [강화 속 고려를 찾아서·(31)]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고려천도공원
고려시대부터 ‘승천포’ ‘승천나루’로 불린 곳
외국사신 오고, 왕이 행차해 맞이한 외교 공간
전쟁 중 몽골 사신 홍고이 등이 묵은 ‘승천관’
승천포는 강화·개성·서울 잇는 교통허브 역할

800년 전 강도(江都) 시기 강화도에는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격인 외교사절을 위한 손님맞이 공간이 따로 있었다.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해안가에 가면 ‘고려천도공원’이 있다. 고려가 1232년 개성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39년간이나 강화를 근거지로 삼아 몽골과 항전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등 다양한 문화적 꽃을 피운 점을 기리기 위한 장소다.
고려천도공원을 조성하기 전인 1999년 강화군에서는 이곳에 ‘고려고종사적비(高麗高宗事蹟碑)’를 먼저 세웠다. 지금도 이 사적비는 고려천도공원의 핵심 요소다. 이곳을 고려 때부터 승천포(昇天浦)라 불렀다. 강화 승천포에는 개성을 비롯한 조강 건너에서 강화도를 방문할 때 이용하는 승천나루가 있었다. 승천나루 부근에는 외국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와 격이 높은 손님의 경우 왕이 직접 나와 맞이하는 궁(宮)이 따로 있었다. 그 숙소를 승천관(昇天館)이라 했고, 왕이 행차하는 영빈관은 제포궁(梯浦宮)이라 했다. 강도 시기 승천포는 사람과 물품이 드나드는 나들목이면서 중요한 국사가 논의되는 외교 공간이었다.

강화 승천포 건너편에 마주 보이는 개풍군 백마산에는 승천부(昇天府)가 있었다. 1232년 7월, 고종이 개성을 떠나 이곳 승천부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다음날 강화 객관에 들었다. 강화의 승천포, 승천나루, 승천관 등의 명칭은 아마도 고종이 북쪽의 승천부를 떠나 새로운 도읍, 강화에 발을 디딘 것을 기억하기 위해 지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승천관은 그 규모가 작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화 승천관에 사신이 숙박했다는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1250년 12월(고종 37년) 기사에 처음으로 보인다. 그때 강화(講和)를 논위하기 위해 몽골 사신 홍고이(洪高伊) 등 48명이 묵었다. 여기에 고려 측에서는 이들을 담당하는 역관이나 수발드는 노비 같은 인력을 별도로 배치했을 터이니 승천관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왕이 행사를 주재하는 영빈관 격인 제포궁의 규모가 더 컸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때 몽골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고종의 제포궁 행차 장면도 흥미롭다. 왕은 연(輦)을 타고 이동했는데 그 연을 호종하기 위해 백관(百官)이라 칭하던 내각의 관료들이 총출동했다. 섣달의 강추위를 막기 위해 왕이 타는 연에는 휘장과 장막을 일컫는 유장(帷帳)을 둘렀던 모양인데, 고종은 자신이 탄 연의 유장을 걷으라고 명했다. 백관이 추위에 떨고 있는데, 자신 혼자서만 추위를 피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고종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 경우다. 이렇게 백관을 대동하고 나온 고종은 제포궁에서 사신맞이 잔치도 크게 열었다. 거기에 딸린 인력과 물자도 만만치 않았을 테다.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인천의 지명(하)’ 송해면 당산리 대목을 보면, ‘제포궁터’를 “제포 동쪽에 있는 고려 제포궁의 터”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당산리 제포 부근에는 농지가 널따랗게 펼쳐져 있는데, 고려 강도 시기인 고종 43년(1256년)에 갯벌을 막아 만들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다.

강화 천도 이후 ‘승천포’라는 명칭은 조강을 사이에 두고 강화에도, 개풍(풍덕)에도 각기 따로 있었다. 16세기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편에 보면, ‘승천포’를 일러 “부의 북쪽 19리에 있다”고 돼 있다. 강화부 청사가 있는 강화읍에서 북쪽으로 19리(1리는 약 400m) 떨어져 있다는 얘기다. 지금의 고려천도공원 부근이다. 같은 책 풍덕군 편에도 승천포의 위치가 나와 있는데, “군 남쪽 15리에 있다”고 돼 있다. 풍덕군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6㎞ 거리에 북한의 승천포가 있다는 설명이다.
강화 승천포의 승천나루는 조선시대에도 여러 돈대를 묶어 관리하는 승천보(昇天堡)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얘기다. 화남 고재형(1846~1919) 선생이 1906년 펴낸 ‘심도기행(沁都記行)’에도 ‘승천포’는 빠지지 않았다. 화남 선생은 승천포 나루에서 배편을 물었는데, 어떤 것은 개성으로 가는 배라 했고, 어떤 것은 한강으로 간다고 했다고 적었다. 그때만 해도 강화의 승천포는 개성과 서울을 잇는 교통 허브였다. 지금은 그 옛날 조선의 병졸들이 지키던 돈대 위치에서 우리 대한민국 해병대가 경계를 서고 있다.

/정진오 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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