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값 치솟는데 호르무즈 리스크까지…AI 시대 ‘붉은 금’ 공급망 흔들리나

박상준 기자 2026. 3. 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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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AI 열풍에 구리 수요 불균형 발생
중동 리스크에 제련 원가·해상 운임 동시 압박
중국 장쑤성 한 공장에서 노동자가 구리 케이블을 감고 있는 모습. 사진=로이터연합뉴스

2025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핵심광물 공급망 위기 흐름에 구리까지 올라타는 모양새다. 중동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구리 공급망에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원유와 LNG 가격 급등이 전력 소모가 큰 구리 제련소의 생산 비용을 끌어올리면서 공급 차질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미 구리 시장은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확충, 전기차와 군수 인프라 확대 등 구조적 수요 증가로 공급 부족 압력이 커진 상태다. 여기에 중동발 에너지·물류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구리 가격이 더 큰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닥터 코퍼'는 옛말? 글로벌 리스크에 구리 가격 천정부지

구리 가격은 지난해부터 가파른 속도로 상승하는 추세다. 런던금속거래소(LME) 구리 가격은 지난해 연초 톤당 8000달러 수준이었으나. 연말인 12월 3일에는 톤당 1만1400달러를 기록하며 30%이상 급등했다. 1만달러 이상으로 치솟은 가격은 올해 3월 6일에는 톤당 1만2800달러를 기록하며 여전히 고공행진 중이다. 그나마 장중 1만4500달러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찍은 지난 1월 대비 다소 안정된 수치다.

당초 구리는 지구상에 널리 매장돼있고 원유나 금보다 지정학·정치 영향을 덜 받는 특성상 글로벌 실물경제 선행지표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글로벌 산업 생산과 제조업 지표가 둔화됨에도 구리 가격은 역으로 치솟으면서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구리는 AI와 전기화 시대의 구조적 필수재가 됐다.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와 냉각 설비, 송배전망, 전기차, 태양광과 풍력 설비 모두 대량의 구리를 사용한다.

로이터는 "전력 케이블용 수요와 AI 데이터센터 확대 기대가 올해 초 구리 랠리를 밀어올린 핵심 요인"이라고 짚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전력망·전기차·재생에너지 설비 확대가 정제 구리 수요를 계속 자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수요가 아니라 공급이다. J.P.모건 글로벌 리서치는 "2026년 미국 정제 구리 시장에서만 약 33만톤의 공급부족이 발생하고, 연평균 가격이 톤당 1만2075달러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에서는 이미 "누가 더 많은 값을 치르고 물량을 선점하느냐"가 공급 경쟁력 자체를 좌우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온다. 미국으로 금속이 빨려 들어가며 다른 지역 현물 수급이 빠듯해지는 현상도 반복되고 있다.

제련업계 사정은 더 복잡하다. 겉으로는 구리 가격이 높지만, 정작 제련소들은 원료 확보 경쟁 탓에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 IEA가 지난 3월 2일 공개한 구리 가격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 연간 구리 제련 벤치마크 TC·RC(정·제련 수수료)는 톤당 0달러로 떨어졌다. 현물 처리 수수료는 이미 2024년부터 마이너스 구간에 들어섰다. 일부 제련소가 정광을 확보하기 위해 오히려 광산업체에 돈을 내는 비정상 구조가 나타난 셈이다. 구리 가격 강세가 곧바로 제련 수익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에서, 제련업체가 무턱대고 구리 생산량을 늘리기도 부담이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도 부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지난해 7월 반제품 구리와 구리 집약 파생제품에 50% 관세를 부과했고, 2027년부터 정련 구리에 15%, 2028년부터는 30%의 단계적 관세 부과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는 반제품 중심의 고율 관세가 시행 중이고, 향후 정련 구리까지 규제 범위가 넓어질 가능성이 열려 있는 구조다. 디지털 물류 플랫폼 트레드링스는 "미국 기업들이 관세 인상 전에 재고를 미리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미국의 구리 수입량은 폭증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호르무즈 해협. 사진=셔터스톡

호르무즈 봉쇄한 이란…에너지·황 물류 경색에 구리까지 타격

여기에 호르무즈 리스크가 덮쳤다. 이란은 그동안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위협해 왔다. 이번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급 직후에도 또다시 봉쇄 카드를 꺼내들었다. 

해당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를 잇는 세계 핵심 해상 통로로,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 요충지다. 하지만 실제 대형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항로 폭은 약 3.2㎞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이곳이 봉쇄될 경우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망 전반에 즉각적인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구리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곧바로 공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산업용 금속보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더 취약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구리 생산은 채굴보다 제련 단계에서 더 큰 에너지 비용이 발생한다. 광산에서 채굴된 구리 정광을 고순도 금속으로 정제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전력과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유와 LNG 가격이 급등하면 전력 가격도 상승하고, 이는 전 세계 구리 제련소의 생산 비용을 동시에 끌어올린다. 결국 에너지 가격 상승→제련 원가 증가 → 생산 축소 → 공급 감소라는 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다른 잠재 리스크는 제련 원료 공급망이다. 구리 생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황산은 황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데, 중동은 글로벌 황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지역이다. 로이터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황 공급이 차질을 빚을 경우 아프리카 구리 생산에도 파급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란의 구리 생산량도 변수다. 이란은 세계 구리 매장 상위 10위권 국가로, 정제 구리 수출 여력도 갖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란의 구리 매장량을 약 1900만~2100만톤 수준으로 추정한다. 이번 전쟁 여파로 현지 주요 구리 광산인 사르체슈메도 가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지며 위기감을 키운다.

일각에서는 호르무즈 봉쇄 사태가 단기 구리 가격에 미치는 직접 영향은 아직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정보 업체 패스트마켓은 호르무즈 공급망 차질이 당장 구리 가격을 폭발적으로 밀어 올릴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석유 등과 달리 구리는 전체 거래 물량 중 이란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고, 기존에도 중동 지역 안보 위기로 인해 핵심 광물 등의 물자 유동이 거의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패스트마켓은 대신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중동발 선적 차질과 황 공급망 교란, 에너지 비용 상승이 누적돼 구리 시장 전반의 부담으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온산제련소. 사진=고려아연

국내 전선업계·고려아연 수혜 기대감도

한편 일련의 흐름에서 수혜를 입는 업종도 존재한다.

전선업계가 대표적이다. 구리는 전선과 케이블의 핵심 원재료다. 원가 상승이 업계 매출확대로 연결된다. 전선 납품 계약 대부분에 원자재 가격 변동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는 판가 연동(에스컬레이션) 조항이 포함돼 있어서다. 여기에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 확대로 전선 수요 자체가 늘고 있는 점도 호재다.

실제로 국내 전선업계는 지난해부터 호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전선은 2025년 4분기 매출 1조92억원, 영업이익 434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21%, 영업이익은 99% 증가했다. 연간 기준으로도 매출 3조6360억원, 영업이익 1286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LS전선 역시 전년 대비 11.5% 증가한 매출 7조5430억원을 기록했다. 

또다른 수혜 후보로 거론되는 업체는 고려아연이다. 고려아연은 2028년까지 구리 생산량을 약 3만톤에서 15만톤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핵심은 광산 개발이 아니라 도시광산과 자원재활용이다. 폐배터리와 산업 폐기물, 전자스크랩에서 금속을 회수해 공급망을 다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구리 보호무역에 대응하기 위한 발판도 마련했다. 미국 현지 폐기물 재가공 업체 이그니오를 인수하고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의 한 축인 자원순환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그니오는 미국에서 전자폐기물을 수거해 친환경 구리 생산 공정의 원료로 가공하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구리 시장가격이 급등하면서 공급망 안정화와 원료 확보 관점에서 이그니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며 "올해 상반기 턴어라운드 전망이 나오는 등 실적 개선 흐름도 양호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