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의 연륜과 장진 유머의 웃기는 결합 "나 아주 싫어해, 불란서"

허세민 2026. 3. 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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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찾지 않는 어느 은행 금고.

서로 이름도, 과거도 모르는 다섯 명의 금고털이범이 이곳에 모였다.

지난 7일 막을 올린 연극 '불란서 금고'는 서로 다른 결의 욕망을 지닌 다섯 명의 금고털이범이 하룻밤 동안 벌이는 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불란서 금고'는 장 감독이 아흔의 대배우 신구에게 헌사하듯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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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불란서 금고'
국내 최고령 신구 배우를 위해 만든 작품
장진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에 관객 폭소
5월 31일까지 혜화동 NOL 서경스퀘어

아무도 찾지 않는 어느 은행 금고. 서로 이름도, 과거도 모르는 다섯 명의 금고털이범이 이곳에 모였다. 두 시간 뒤, 밤 열 두시가 되면 작전이 시작된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허황된, 때로는 그릇된 욕망이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연극 '불란서 금고'의 한 장면./사진=파크컴퍼니

지난 7일 막을 올린 연극 '불란서 금고'는 서로 다른 결의 욕망을 지닌 다섯 명의 금고털이범이 하룻밤 동안 벌이는 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연극으로 탄생해 영화로도 흥행한 '웰컴 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의 장진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연극이다. 긴장감 넘치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끌어내는 장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가 곳곳에 녹아 있다.

'불란서 금고'는 장 감독이 아흔의 대배우 신구에게 헌사하듯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장 감독이 지난해 신구가 출연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뒤 그를 위한 작품을 구상한 게 출발점이었다. 국내 최고령 현역 배우인 신구는 이번 작품에서 시력을 잃은 대신 예민한 청력을 얻은 금고털이 장인 '맹인' 역을 맡았다.

신구는 무대 위 암전이 찾아올 때마다 후배 배우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졌지만, 극을 여는 묵직한 첫 대사에서부터 "나 아주 싫어해, 불란서"와 같은 익살스러운 대목까지 농익은 연기로 무대를 압도하는 힘만큼은 여전했다.

금고 안의 무언가를 탐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찰음"을 내는 금고를 여는 행위 자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맹인의 모습은 그저 "살아 있으니까 연극을 한다"는 신구의 연기 철학과 묘하게 겹치며 여운을 남겼다.

연극 '불란서 금고'의 한 장면./사진=파크컴퍼니

맹인과 함께 금고를 터는 나머지 네 캐릭터와 극 말미에 등장하는 경비원까지 모든 배역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쉰다. 특히 겉으론 친절해 보이지만 잔혹한 이면을 가진 '은행원' 역의 김슬기는 광기 어린 눈빛 연기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허당 '건달'과 어딘지 모르게 의뭉스러운 '교수', 명쾌한 판단력의 '밀수' 등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주고받는 치밀한 대사 속에 긴장감이 흐르다가도 저항 없이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무대는 지하 금고라는 한정된 공간을 비추지만 다채로운 조명 연출을 통해 공간적 한계를 감각적으로 극복했다.

극은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을 거듭한다. 금고를 열 수 없는 돌발상황에서부터 금고를 열기 전 발각될 위기까지. 이러한 혼란 속에서 펼쳐지는 각 캐릭터의 서사도 몰입감을 선사한다.

다섯 인물은 저마다의 기구한 사연만큼이나 욕망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인생을 역전시킬 일확천금을, 누군가는 처절한 복수를, 누군가는 자신의 치부를 영원히 덮어줄 단서를 금고 안에서 찾는다. '불란서 금고'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소동을 통해 결국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유쾌한 웃음으로 풀어낸 수작이라 할만하다. 공연은 오는 5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혜화동 NOL 서경스퀘어 스콘 1관에서.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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