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번째 줄에 앉은 관객’을 위한 음악은?

“예술가들은 세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두번째 그룹은 반항적이며 어려울수록 투쟁하고 항의한다. 숫적으로 우세인 세번째는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투사들과 반항하는 무리를 보면 대개 연극계와 문학계에서 생겨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클래식 음악계는 완전한 침묵이 지배한다.”
이렇게 일갈한 이는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다. 클래식 음악가의 정치적 발언이 흔치 않은 상황에서, 그는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가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불편하기를 자처했고 침묵 뒤에 숨지 않았다. 그는 지난해 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추악함을 가져왔다”면서 예정됐던 공연 보이콧을 선언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에는 러시아에서도 공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국인 헝가리와도 껄끄럽다. 극우 성향의 오르반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을 미국 워싱턴포스트, 영국 가디언, 오스트리아 디프레세 등 주요 언론에 기고했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는 “양 손목을 잘라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기까지 했다. 2000년 오스트리아 극우 정치인 외르크 하이더가 집권했을 때도 오스트리아 공연을 거부하는 등 유럽의 우경화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하나의 목소리는 하나의 작은 물방울 밖에 되지 못한다. 하지만 침묵은 별 생각없이 공범자가 되는 한 걸음일 것이다”. 양심의 소리를 따라 온 그의 신념이다.
원칙과 본질에 집중하는 삶의 궤적은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아니스트의 교과서’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라 불릴만큼 예술적 일가를 이룬 그는 악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평생 바흐를 탐구해 온 그가 생각하는 음악의 본질은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 구조를 표현하는 것이다. 음악은 기교의 과시와 경쟁이 아닌 이해와 사유의 과정이라는 것. 이 때문에 콩쿠르에 대해서도 단호한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다. 산업이 된 콩쿠르에서 요구되는 조건은 실제 콘서트 무대에서 요구되는 것과 다르다는 것, 곡예와 무오류성은 예술에서 최고로 찬탄할만한 덕목에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2023년 내놨던 대담집 <음악은 고요로부터>에서 “심사위원단은 가능한 한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참가자를 고른다”고 쓰기도 했다.
공연 당일 자신의 프로그램을 공개하는 것도 그가 고수해온 방식이다. 클래식 공연은 보통 수개월, 길게는 1, 2년 전에 프로그램이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시스템이다. 상품으로서의 공연, 클래식 산업의 일반적인 관행이지만 그는 음악이 가져야 할 자유와 즉흥성을 살리기 위해 이를 거부해왔다. “내일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1년 뒤에 무엇을 연주할지 미리 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어떤 날 어떤 곡을 선택할지는 그날의 상태와 기분, 공연장의 음향, 악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그날의 프로그램은 나에게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지금까지 여러차례 내한공연을 통해 국내 팬들과 만나왔던 그가 오는 13일 부산콘서트홀, 15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공연 당일에 프로그램을 공개한다. 그간 바로크부터 초기낭만주의까지 작곡가들에 중점을 두어왔던 것을 감안하면 대략 예상해 볼 수도 있겠다. 내한을 앞두고 경향신문과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클릭 수나 ‘좋아요’가 많은 피아니스트를 위대한 연주자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요즘 젊은 음악가들 가운데 이를 통해 큰 명성을 얻은 이들도 있지만 음악적으로 정작 전할 내용이 거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소셜미디어에 대한 불편함도 내비쳤다. 고집스러운 일흔 셋의 예술가에게 70대가 되어 느껴지는 새로운 책임감과 소회를 물었다.
“50년전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졌지만 저는 음악 안에서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빠른 악장은 느려졌고, 느린 악장은 더 흐르게 되었어요. 젊은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연주합니다. 그리고 20번째 줄에 앉아 있는 관객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아요. 음악은 서두르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비교적 긴 삶에서 저는 운이 좋았고 목표한 것들을 모두 이뤘습니다. 단, 하나 이루지 못한 소망이 있다면 좋은 작곡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재능은 저에게 조금 부족한 것 같네요.”
박경은 선임기자 ki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란, ‘호르무즈 해협 통과’ 조건 내놨는데···“미·이스라엘 외교관 쫓아내면”
- ‘3억원 돈다발’ 든 가방이 지하철에···역 직원 신고로 2시간 반 만에 주인 찾아
- 경찰, ‘저속노화’ 정희원 송치···강제추행 혐의는 제외
- “미안하다” 유서 남기고···임실서 노모·아들·손자 숨진채 발견
- 4500원짜리 담배, 호주서 1만3000원에 되팔이···담배 90만갑 밀수출로 100억 챙겼다
- 서울지하철 5호선 김포·인천 검단신도시 연장사업 예타 통과
- ‘음주운전 부인하다 시인’ 배우 이재룡, 경찰 출석···조사 중
- [단독]현직 검사, 쿠팡 수사 언급하며 “사건처리 방식 적정했나” 내부망 글
- 국민의힘, ‘윤석열 복귀 반대’ 결의문에 침묵하는 장동혁…후속 조치는 없을 듯
- 50m ‘쓰레기 산’ 무너져 7명 사망···인도네시아 ‘세계 최대 매립지’의 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