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김수미의 'K-씨어터'…현실 비틀어 '다른 세계' 여는 김시번-②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연출가 김시번 [본인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0/yonhap/20260310102928331tjti.jpg)
"연극의 강렬한 현장성은 연극의 사회적 기능과도 연결됩니다. 연극은 동시대인을 위한, 동시대인이 함께 나누는 정서적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무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지금의 관객이 공감해야 합니다."
연출가 김시번이 강조한 대로 그가 연극에서 중요하게 붙잡는 것은 '연극의 사회적 기능'이다. 그가 강조하는 사회적 기능은 선동이 아니라 감각의 전환이다. 관객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현실을 잠시 낯설게 보게 만드는 것, "이게 정말 당연한가?"를 묻도록 무대가 툭 건드리는 것. 그는 연극을 통해 관객이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되는 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상상은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다시 돌아볼 힘을 만드는 짧은 숨구멍이다.
그래서 김시번의 연출은 대체로 '정답' 대신 '질문'에 가깝다. 현실이 너무 확고할수록, 연극은 더 비틀고 더 돌아가고 더 웃는다. 김시번이 코미디를 놓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설계하는 웃음은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현실의 권위를 잠깐 무너뜨리는 균열이다. 웃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기보다, 오히려 생각이 남는다.
"왜 저 장면이 웃겼지?"라는 질문이 돌아오고, 그 질문이 관객을 다시 현실로 데려간다.
김시번의 무대가 흥미로운 지점은, 그 질문이 늘 '우리'에게 향한다는 데 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방식보다,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들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종 현재의 갈등, 혐오, 분열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무대 위의 호흡은 의외로 '유쾌'하다. 유쾌함은 현실을 덮기 위한 설탕이 아니라, 현실을 더 또렷하게 보기 위한 조명이다.
"제가 지난 2010년대에 창작한 연극은 특히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많이 다뤘습니다. 정치적으로 수구 세력이 집권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퇴보가 노골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였지요. 저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고 어떻게든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연극 속에 그러한 내용이 많이 녹아들어 갔습니다."
대표작 '안진사가 죽었다'의 탄생 비화
![연극 '안진사가 죽었다' 포스터 [극단 성난 발명가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10/yonhap/20260310102928552ecnb.jpg)
김시번의 대표작을 꼽을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 '안진사가 죽었다'(2012)다. 정조 시대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실화 '안종면 살인사건'을 재해석해 연극으로 풀어낸 사극으로, 조선시대 실제 살인사건을 수사해가는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사법 체계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연극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한여름 밤, 양반 유생들이 모여 시문을 논하는 문회소에서 진사 안종면이 유생들과 함께 잠을 자던 중 흉기에 배가 갈려 살해된 채 발견된다. 대청마루가 피로 흥건해졌지만, 같은 공간에 있던 누구도 살인을 알아차리지 못한 '귀신도 곡할' 사건이다.
실마리를 찾지 못한 송화 현감은 안진사와 원한이 있던 정여인을 체포해 고문으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사건을 덮으려 한다. 이에 정여인의 딸 오애기는 한양으로 달려가 대궐 앞에서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연을 들은 정조는 재조사를 명해 특별수사관 이강헌을 송화로 파견한다.
하지만 송화의 관원들은 수사를 방해하고, 목격자들의 증언도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강헌은 '진범이 따로 있다'는 확신으로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마침내 재력가이자 교육자이며 명망가로 알려졌던 안진사의 감춰진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과 함께, 의외의 진범과 사건의 진실에 도달한다.
사실 제목부터가 싸늘하다. '죽었다'는 단정은 시작부터 사건을 끝내버리는 것 같지만, 김시번의 무대는 그 단정 위에서 다시 묻는다. 누가, 왜,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그 죽음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비추는가'다.
이 작품은 익숙한 한국적 서사와 정서를 적극적으로 호출한다. 하지만 전통은 박제된 장식이 아니라 동시대의 언어로 다시 작동한다. 작품 소개 자료가 강조하는 것도 그 지점이다. 전통의 형식과 리듬, 인물의 관계가 오늘의 갈등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무대는 '옛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결국 '지금의 이야기'라는 설정이다.
'안진사가 죽었다'의 구조는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김시번은 비극의 재료를 코미디의 리듬으로 다룬다. 여기서 코미디는 웃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폭력과 위선이 얼마나 일상에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 관객은 편해지기보다 찔린다. 왜냐하면 그 웃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습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인물의 욕망과 체면, 공동체의 시선이 서로 얽히며 사건을 키워간다. 어떤 인물은 권력을 쥐고, 어떤 인물은 그 권력에 기대고, 또 다른 인물은 그 틈에서 생존을 모색한다. 그 관계가 만들어내는 '추한 합리화'가 관객을 서늘하게 만든다. 김시번은 이 서늘함을 정면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장면의 리듬과 말의 엇갈림, 몸의 과장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관객이 스스로 알아차리게 만든다. 연출가가 정답을 제시할수록 연극은 설교가 되지만, 김시번은 설교 대신 '정황'을 만든다.
김시번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조금이라도 더 가지겠다고 뺏고 때리는 욕심쟁이 권력자가 있고, 눈곱만큼 있는 거 다 빼앗기고 얻어맞아도 하소연할 데 없는 힘없는 백성이 있다. 그는 법은 가진 자들을 위해 존재하고 규율은 있으나 마나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말을 작품에 녹여 냈다. 사법은 통치와 통제와 교화의 수단일 뿐, 말로는 하늘 같다 떠받드는 '백성'과 '사람'은 온데간데없다는 게 그의 시선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시대는 바뀌어도 세월은 맴을 돌고 백성들 삶은 갈수록 고단해집니다. 다스리는 분들, 가진 분들, 가르치는 분들에게 안진사의 죽음으로 교훈을 던졌습니다. 사람을 하늘같이 여기라고."
김시번은 이 작품을 2008년에 기획했다. 그 자신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충격적인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무차별 난사했고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던 그는 물대포에 온몸이 젖은 채 밤새도록 전경에게 쫓겨 다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때리지 마. 밟지 마. 빼앗지 마. 죽이지 마."
이 네 마디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안종면 살인사건'에 관한 기록을 접했고, 이 실화를 바탕으로 연극 '안진사가 죽었다'를 썼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때리지 마, 밟지 마, 빼앗지 마, 죽이지 마'라는 백성의 절규를 담아내려 했다.
'정치'와 '코미디'로 확장해 온 연작
극단 '성난발명가들'의 작업 목록을 보면 김시번의 관심사가 '정치'와 '코미디'를 축으로 확장돼 왔음을 읽을 수 있다. 작품들은 특정 사건을 직접 재현하기보다, 동시대의 공기를 붙잡아 풍자와 아이러니, 생활의 언어로 무대 위에 옮긴다.
'공화국 508호', '블러드 스테이션', '혼밥의 고수'가 박근혜 정권 시절의 답답했던 정치 상황을 대놓고 풍자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2018년 3월, 고도화된 디지털 자본주의에 삶을 잠식당하는 시민의 모습을 풍자한 '헤이, 빅브로!'를 공연했다.
곧이어 2018년 5월에는 끊임없이 자기 착취와 소비 충동에 내몰리는 현대인을 숙주에 비유한 '숙주탐구'를 공연했다. 이러한 작업은 그 관찰의 결론이 비관이 아니라 '그래도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는 쪽으로 향해 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김시번의 연출 세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그는 현실을 고발하는 대신, 현실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무대를 설계한다. 그리고 그 설계의 핵심에는 늘 관객이 있다. 관객이 잠깐 웃고, 잠깐 멈추고, 잠깐 자기 삶을 돌아보는 순간. 그 짧은 순간들이 모여 연극은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다.
요즘의 연극이 종종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조급해질 때, 김시번의 무대는 반대로 '어떻게 보게 할 것인가'로 돌아간다. 그 차이가 그의 작품을 오래 남게 한다. '안진사가 죽었다'의 서늘한 웃음도, '굿닥터'의 따뜻한 비애도, 결국은 같은 곳을 향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꾸준히 사회성을 담은 연극, 정치를 풍자한 연극을 해왔지만, 별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창작자는 이미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잘 알고 있고 사회적 메시지를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대의 수구적이고 답답했던 사회 현실을 사극, 코미디, 로맨스, SF, 판타지라는 다양한 장르의 그릇에 담아내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려고 시도했을 뿐입니다."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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