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이 흘러 만든 마을, 김녕
제주의 진가는 멋진 관광지에만 있지 않다. 중산간부터 바닷가까지 긴 세월에 걸쳐 주민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곳, 바로 마을에서 더욱 멋진 제주를 만날 수 있다. 심규호 중국학회회장이 신발 끈을 질끈 묶고 제주 마을로 향한다. 심규호 회장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마을 이야기를 [제주의소리]를 통해 만나보자. [편집자 주]
천하제일 마을
김녕은 '천하제일' 마을이다. 천하는 하늘 아래라는 말이니 하늘 아래 첫 번째 마을, 최고의 마을이라는 뜻일 터이다. 어떤 마을인들 하늘 아래 있지 않겠는가? '제일第一'이란 말도 누구든 쓸 수 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쓴 까닭은 김녕 사람들의 '바람'을 표출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일'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자신감, '제일' 멋진 마을을 만들겠다는 소망과 의지, '제일'로 서로 어울려 상부상조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자부심 등이 어울려 '천하제일'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찌 지금만 그러하겠는가? 그 옛날 송당리에서 태어난 소천국과 백주또의 여섯 째 아들 궤네깃또가 제주를 돌아다니다 '천하명당'이라 여기고 정주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천하제일' 마을의 증좌가 아니겠는가?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살만하기에 머무는 곳이고, 머물기에 쌓이게 된다. 사람이 머물며 쌓은 것을 일러 문화라고 한다. 이왕 김녕을 '천하제일'의 마을이라 말한다면, 그 소망을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김녕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마을이름의 유래
김녕이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났나?
쇠붙이가 나오는 곳이라 하여 쇠 금金을 붙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구좌읍지』에 따르면 김녕의 지형이 쇠 金자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녕은 지형의 형태를 본 따서 이름을 지었다. 바다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입산봉笠山峰, 오른쪽에 묘산봉猫山峰이 八자 형태로 앉아 있고, 바지ᄆᆞ를, 거커ᄆᆞ를, 망ᄆᆞ를이 능선을 이루었으며, 그 밑으로 신산, 새동산, 남흘이 또 하나의 획을 이루었다. 종선縱線으로 남문골에서 하늘래까지 길게 이어졌고, 왼쪽에 소여, 오른쪽에 한 개코지가 점을 만들어 '김金'자 형태를 띠었으며, 산에서 바라보았을 때 '平'자를 이룬 모양이어서 '김녕'이라고 명명했다."
흥미로운 유래 설명이다. 실제로 김녕 덩개해안에서 김녕리를 바라보면, 멀리 한라산이 보이고, 괴살메오름과 입산笠山오름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생각건대 우리나라 마을 이름이 대부분 그렇듯이 원래 구어로만 쓰던 이름을 한자로 음역 또는 의역하여 김녕金寧(짐녕)이 나왔을 터이니 흥미롭기는 하되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용암이 흘러 만든 마을
그 옛날 땅속의 붉은 기운이 불을 토하여 하늘 높이 연기가 치솟고 바위가 녹은 물이 사방으로 분출하더니 바다를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붉은 용암은 땅 아래로 흘러 동굴을 만들었고, 땅 위로 흐르던 용암은 이리저리 길을 찾아 흘러가다 바다와 만나 용트림을 하며 굳어갔다. 용암은 돌이 녹아 흐르는 액체이니 굳으면 다시 돌이 된다. 이름도 검고 거센 현무암玄武巖이다.

이렇듯 김녕은 땅 아래와 위로 붉은 기운이 흘러 아래에는 동굴을 위에는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당연히 김녕마을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돌이다. 용암지질, 동굴, 밭담, 덩개해안, 두럭산, 도대불(돌을 이용한 구조물) 등등 이 모든 것이 돌과 관련이 있다. 돌의 상징을 어떻게 마을이 제대로 활용할 것인가? 제주의 다른 마을과 어떻게 차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과제이다.
만장굴萬丈窟

1992년 김녕사굴과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었다.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과 함께 의 대표적인 동굴이다. 거문오름부터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 동굴에 이르기까지 약 14.6㎞에 걸쳐 거의 직선적으로 형성된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가장 긴 동굴이다. 지도를 보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이 나오는데, 만장굴과 김녕굴은 김녕리, 용천동굴과 당처물동굴은 월정리에 속한다.
전체 길이는 7.4km, 폭이 18m, 높이 23m이다. 용암석순, 유석, 유선 외에도 7.6m 높이의 용암석주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경관이다. 2년 전만해도 1km 정도 관람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폐쇄 상태이다. 김녕굴이나 용천동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만장굴이 어둠 속에서 햇살을 보게 된 것은 1946년 부종휴 선생과 꼬마탐험대 덕분이다. 세화리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진주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김녕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교사 시절 빌레못동굴, 수산동굴, 미약굴 등 제주의 여러 동굴을 탐험했으며, '꼬마탐험대'라 이름붙인 3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만장굴을 탐사했다. 하여 나비박사 석주명, 사진가 홍정표 등과 함께 제주학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1946년이면 이제 막 해방되어 정신이 없었을 때 아닌가? 생물담당교수였던 스승 요코야마의 영향도 있다고 하나 그의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제주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 때문이 아닐까? 부종휴 만장길에는 「만장굴의 시작」이란 제목의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만장길의 종착지이자 부종휴와 꼬마탐험대가 탐사를 시작했던 제1입구입니다. 이곳에서부터 한라산 북으로 모두 세 개의 입구가 있습니다. 부종휴와 꼬마탐험대는 제1입구에서 제3입구까지 7.4km 길이의 동굴 속 탐사 만장굴의 실체를 밝혀냈습니다. 현재는 제2입구에서 1km 구간만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용암동굴이 있지만 만장굴처럼 웅장한 형태와 동굴생성물이 잘 보존된 곳은 드물다고 합니다. 만장굴의 가치가 빛나는 이유입니다."
뱀인가 용인가?
김녕리와 월정리 사이에 큰 굴에 커다란 뱀이 살고 있었다. 뱀이 해코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사람들은 무력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해마다 큰 굿을 하고 제물로 처녀를 바치라고 했다. 싫지만 어떨 수 없었던 이들은 주로 천민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 그러자 정말로 뱀이 굴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조선조 중종 시절 서련이라는 판관이 제주로 부임하였는데, 사굴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여 뱀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는 무당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큰 굿을 하도록 하고 자신은 군사들과 함께 바위 뒤에 숨어 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굿이 시작되고 뱀이 나오자 서련은 달려들어 검으로 뱀의 목을 쳤다. 뱀은 목이 두 동강이가 난 채로 죽고 말았다. 심방이 서련 판관에게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서련은 황급히 말에 올라타 제주성 동문 밖까지 이르렀는데, 성을 지키던 군사가 소리쳣다. "피비가 따라옵니다." 이에 놀란 서련이 뒤를 쳐다본 순간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뱀에서 흘러나온 피가 하늘로 올라 피구름이 되어 서련을 따라온 것이었다.
김녕굴(김녕사굴)에 관한 설화이다. 서련은 연안 서씨로 조선시대 참군을 지낸 서의민徐義敏의 3대손으로 19세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판관으로 부임하여 사신당蛇神堂 철폐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실제 인물인 서련은 1515년 4월 10일 관사에서 세상을 떠나고 유해는 고향인 충청도 홍성에 안치되었으며, 지금도 후손들이 제를 지내고 있다. 사굴 입구에는 제주판관서련공사적비濟州判官徐憐公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김녕굴(김녕사굴)은 거문오름용암동굴계로 세계자연유산에 포함되며, 길이는 705m S자형 이층 용암동굴이며, 입구가 뱀의 머리처럼 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가늘어진다.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별꼴학교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