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박싱 연구실] 10시간 가마 대신 '단 2초'만에 세라믹을 만들었다

김만기 2026. 3. 10.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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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한양대 엄영호 교수팀
아라미드 섬유 활용한 '세라믹 도우' 개발
반도체·우주항공 혁신 예고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아라미드 섬유를 첨가해 상온에서 단 2초 만에 정교한 세라믹 부품을 찍어내는 공정을 시각화했다. 기존의 고온 가마 소결 방식과 대비해 에너지 효율과 정교함을 획기적으로 높였으며, 반도체·우주항공·LED 등 다양한 미래 산업에 적용이 가능하다. (그래픽=제미나이 생성)
[파이낸셜뉴스] 한양대 엄영호 교수팀이 찰흙처럼 자유롭게 빚고 도장 찍듯 찍어낼 수 있는 세라믹 성형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뜨거운 가마에 굽는 과정 없이도 2초 만에 정교한 부품을 만들 수 있어 반도체와 항공우주 산업의 혁신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본래 세라믹은 열에 강하고 단단하지만,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가 무척 까다로운 소재다. 금속처럼 녹여서 틀에 붓기도 어렵고, 굳은 뒤에는 조금만 충격을 줘도 유리처럼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가루를 틀에 넣고 섭씨 1,000도가 넘는 고온의 가마에서 오랫동안 구워내는 '소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은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할 뿐만 아니라, 굽는 과정에서 크기가 줄어들어 정교한 모양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우주항공과 반도체의 열을 식히는 '맞춤형 방패'

엄 교수팀이 개발한 이 기술은 앞으로 우리 주변의 전자기기와 미래 이동수단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일 전망이다. 가장 먼저 적용될 분야는 반도체와 우주항공 산업이다. 최근 전자제품이 고성능화되면서 기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을 밖으로 빼내는 '방열' 기술이 매우 중요해졌다. 특히 차세대 파워반도체나 LED 전등은 엄청난 열을 뿜어내는데, 연구팀의 세라믹 기술은 이 열을 식혀주는 방열판을 맞춤형으로 만드는 데 최적이다.

또한 영하 50도의 혹한부터 영상 200도의 고온까지 견디는 강한 내구성을 갖췄다. 이는 극한 환경에서 작동해야 하는 인공위성이나 우주 발사체의 부품 소재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기존에는 3D 프린팅으로 이런 부품을 만들려면 수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대량 생산 공정에서 몇 초 만에 정교한 세라믹 부품을 찍어낼 수 있게 됐다.

■지점토에서 찾은 힌트, 2초 만에 끝나는 성형의 마법

연구팀은 우리가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지점토'의 원리에서 힌트를 얻었다. 지점토에 섞인 섬유질이 반죽을 질기게 만들 듯, 세라믹 가루에 아주 튼튼한 '아라미드 슈퍼섬유'를 섞어준 것이다. 아라미드 섬유는 방탄조끼에 쓰일 정도로 튼튼한 소재다. 연구팀은 나노와 마이크로 크기의 섬유가 세라믹 입자 사이사이를 마치 그물망처럼 연결하는 '브릿징(bridging) 기술'을 구현했다.

이 그물망 구조 덕분에 세라믹 반죽은 평소에는 고체처럼 형태를 유지하다가, 틀에 넣고 꾹 누르면 단 2초 만에 아주 복잡한 3차원 모양으로 변신한다.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10시간 넘게 구워야 했던 기존 공정과 달리, 상온에서 즉시 모양을 잡을 수 있다. 덕분에 공정 에너지를 90% 이상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반죽을 '세라믹 도우(Dough)'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가 주목한 정교함, 깨지지 않는 세라믹의 탄생

이번 연구 성과는 재료 과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지인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즈(Advanced Materials)' 최신호에 게재되며 그 혁신성을 입증받았다. 실험 결과, 도장 찍듯 찍어낸 결과물은 설계된 도면과 89.4%라는 높은 일치율을 보였다. 세라믹 입자 사이를 섬유가 촘촘히 붙잡아준 덕분에, 눌리는 과정에서도 입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정해진 모양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또한 개발된 세라믹 도우는 기존 세라믹의 고질적인 문제인 깨지기 쉬운 성질(취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섬유가 입자들을 단단히 묶어주어 충격을 받아도 균열이 쉽게 퍼지지 않는 고탄성 특성을 갖게 되었다. 열 전도 성능도 놓치지 않았다. 세라믹 입자를 연결하기 위해 흔히 쓰이는 접착제의 양을 전체 부피의 5.1% 수준으로 최소화했다. 접착제가 줄어든 만큼 열 전달 효율은 기존 복합소재 대비 2~3배 가량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이번 연구는 고에너지 소모 공정이었던 세라믹 성형을 상온에서 이루어지는 초고속 공정으로 탈바꿈시켰다. 대학 연구실에서 시작된 이 작은 '도우' 한 덩어리가 미래 산업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도구가 될 준비를 마쳤다. 오늘 언박싱한 이 연구가 우리 삶을 얼마나 시원하고 안전하게 바꿔놓을지 기대된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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