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타잔’과 ‘난쏘공’의 비극…‘영끌족’의 비명으로

한겨레 2026. 3. 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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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장남수 노동의 문장] 13화 ‘세상의 끝’에 있는 내 집
경남 밀양에서 필자가 15살 때까지 살던 고향집. 농촌의 작은 방 두개인 집에서 온 식구가 이불 하나를 당기고 밀며 살았다. 필자 제공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대통령이 집을 팔며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기대와 관망이 교차한다. 정책이 아무리 바뀌어도 가진 사람들은 역으로 활용하고 서민은 더 힘겨워지고 마는 허탈이 반복되어온 탓이다. 집이 누군가에겐 자산 증식의 도구이거나 정치적 결단일 때, 누군가에게 집은 평생을 바쳐도 닿기 어려운 신기루였다. 정치인이 여러 채의 집 중에 어떤 집을 팔고 남길까 고민하는 지금도 우리 사회의 주춧돌을 받치고 쌓은 서민층은 여전히 몸 하나 누일 공간이 절박하다.

1977년 섬유직물공장 원풍모방에 입사해 노조 활동을 하면서 ‘월간대화’에서 ‘무등산 타잔의 진실’을 접했다. 서울 사당동 산동네의 주거지를 철거당해 맨바닥에 내몰린 주민들도 다큐로 보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주민들이 고장 난 세상을 고치며 살던 ‘행복동’ 집이 ‘도시 정비’와 ‘재개발’을 이유로 폐허가 되었다. 이들은 더 외곽으로 밀려나 판자를 얼기설기 엮었으나 철거는 반복되었고 불안한 어른들 옆에서 아이들은 부서진 잔해로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노동자가 되어서 또 다른 산동네를 오르내릴 때 세상은 88올림픽의 열기를 지피고 있었다. 세계인에게 보일 도시의 미관을 위해 성화가 타오르기 전 또다시 산동네의 판잣집은 철거반의 망치질 몇번에 흙먼지가 되었다. 깨진 벽돌을 가지고 놀던 노동자의 자식들은 자라나 ‘영끌 세대’가 되어 파산하거나 도시의 셋방을 전전했다. 서민에게 주거의 문제는 아득한 신기루이자 절망과 무력감의 반복이었다.

1970년 서울 사당동 판자촌 주민과 당국의 강제철거 갈등을 다룬 경향신문 보도. 경향신문 1970년 11월11일치

어릴 때 나는 농촌의 작은 방 두개인 집에서 온 식구가 이불 하나를 당기고 밀며 살았다. 그래도 여름엔 멍석 깔고 별을 볼 마당이 있었다. 열다섯살, 서울에서 공장일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올라간 신정동의 단칸 셋방은 내 발 하나 들일 틈이 없었다. 그 방에서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살던 식구들이 버티지 못해 삼륜차에 짐을 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후 나는 사탕 공장, 전자 공장을 거쳐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근무조에 따라 3개 층으로 지어진 기숙사는 방마다 13명이 정원이었으나 그마저도 항상 대기자가 있었다. 신입생의 자리는 문 옆과 창가 양쪽 가장자리부터 시작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특히 문 옆자리는 좋지 않았다. 방 식구들이 드나드느라 여닫을 때마다 툭툭 닿기도 했고 머리 위의 구석에는 개인 세안 용품을 담은 세숫대야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몸부림을 치다 팔로 옆자리 선배 머리를 치고 선배의 다리가 내 이불을 감고 있기도 한, 가로 폭 70㎝ 남짓의 공간이 이십대 초반 나의 거주지였다. 문 옆자리를 겨우 벗어날 즈음에 전두환의 계엄사가 나를 해고했으니 가운데 자리의 기회도 끝내 멀어졌다.

해고자가 된 뒤 자취방은 정보과 형사의 눈초리나 주인집의 부당한 간섭도 문제였지만 때로는 공포를 동반했다.

길에서 주방이 들여다보이는 반지하 방에 살 때였다. 화장실은 지상의 계단을 올라간 대문 옆에 있었고 방에 딸린 주방은 욕실을 겸했다. 한쪽 구석에 찬장과 풍로를 놓고 연탄아궁이 옆 수도꼭지를 이용해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야 했는데 어느 날 세수를 하던 중 느낌이 싸해 고개를 드니 담장의 구멍 사이로 까만 눈동자가 번뜩했다. 나도 모르게 “누구야” 소리치자, 괴한이 후다닥 튀어 달아났다. 이럴 때 쫓아가면 안 된다는데 순간 분이 치밀어 대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시커먼 물체 하나가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그때야 몸이 후들거렸다.

이사도 쉬운 게 아니었다. 주인집이 흔쾌히 방을 빼주어야 하고 전 재산인 보증금을 탈 없이 돌려받을 수 있어야 했다. 세를 살아보면 매번 계약 기한이 차지 않았다거나, 전세금을 올린다거나, 주인이 전세금 빼주는 걸 질질 끌며 연락을 받지 않는 등으로 가슴이 타들어 가는 불안과 초조함을 겪는다.

지상의 방 한 칸은 높고도 아득해 또 다른 반지하 셋방으로 옮겼다. 여름의 눅눅한 습기는 감수하더라도 어느 해 장마가 극심했던 여름, 며칠 지방에 다녀오니 방바닥에 쌓아 둔 책이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안전한 주거는 요원한 꿈이었다.

내가 해고자인 것만도 모자라 해고노동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보니 이후의 주거 난민 생활은 예정된 미래였다. 벌어봐야 집주인에게 바치기 바빠 유목민처럼 떠돌았다.

“집 문제가 닥칠 때마다 타이태닉의 보트에서 밀려나 홀로 바다에 떠도는 기분이었다. 난민은 나라 잃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또 이사 갔어? 어 케이(K)시에 사는 거 아니었어? 택배 기산데요 왔는데 이사 가셨다고 해서요…. 매번 수첩을 펼쳐놓고 빼곡한 우편물 수령지를 새 주소로 바꿔 놓아도 예전 주소로 뭔가 배달되었다. 같은 사람에게 새 주소를 알릴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다. 연수는 그때마다농담처럼 말했다. 내가 방랑벽이 있어서….”

나의 단편소설집 ‘파문’ 중 ‘집의 조건’에 있는 한 대목이다.

지난해 집 등기를 했다. 담보대출을 안았지만 일단 임대는 벗어났다. 제주도에 와서 연세를 내며 살다 ‘10년 임대 후 분양 전환’ 아파트에 당첨된 행운 덕이다. 평생 노동을 놓은 적 없는 60대 비정규직 노동자 부부의 현주소다. 우리 가족의 제주도 이주는 낭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밀려난 자의 선택이었다.

정원 13명의 기숙사 한뼘 공간이나, 옆방의 숨소리도 다 들리는 다닥다닥한 쪽방을 거친 후 내 집 마련을 하기까지 동료들도 그만그만 비슷했다.

1982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체당한 원풍모방 노조는 현재 170여명을 유지하며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주소를 보면 경기도가 60여명, 서울이 40여명, 그 외는 정읍 순창 장성 부산 당진 제천 철원 대전 세종 강릉 제주 등 전국구다. 한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하거나 강남에 주소를 둔 이는 없어 보인다.

1977년 4월20일 광주 무등산 무당골에서 일어난 비극은 유신시대 강제철거의 잔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가난으로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취업해 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청년 박흥숙은 자신의 판잣집을 불태우는 철거반원들과 다투다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26살에 사형장에서 생을 마쳤다. ‘무등산 타잔’으로 불렸던 박흥숙이 사건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1977년 광주 무등산 판자촌을 철거해 불태우는 과정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이 된 ‘무등산 타잔’과 굴뚝 위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린 ‘난쏘공’의 가족들, 쪽방과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산업의 전사로 일한 노동자들, 간밤에 깨진 안방 벽돌을 가지고 놀며 자라 ‘영끌’의 꿈마저 처참해진 청년들에게 안전한 주거권은 없었다. 지금도 무등산의 흙집을 부순 망치와 행복동을 밀어낸 포클레인은 감당할 수 없는 주거비와 부채로 무주택자의 삶을 압박하고 있다. 서민들에게 집은 ‘세상의 끝’만큼 아득하기만 하다.

부디 주택정책이 또 한번의 무력감으로 학습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누구도 삶의 벼랑 끝으로 밀려나지 않게 주거기본권을 보장하는 사회적 약속이어야 한다. 집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정치인들의 공방이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만다면, 주거 공간을 빼앗기고 배제당한 이들의 통곡을 덮는 소음일 뿐이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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