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리스크에 환율 출렁이자… 은행권 외화 유동성 관리 ‘고삐’
변동폭 코로나 이후 최대 수준
5대 은행 외화 LCR 142~201%
당국 규제 기준 웃돌지만 CET1 변수

중동발 지정학적 긴장으로 원·달러 환율 변동성이 확대되자 은행권이 외화 유동성 관리에 고삐를 죄고 있다. 최근 야간 거래에서 환율이 한때 1500원을 넘어서는 등 급등락이 이어지면서 외화 조달 여건과 자금 흐름을 점검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다만 주요 은행들의 외화 유동성 지표는 규제 수준을 크게 웃돌고 있어 당장 유동성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9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은 올해 2월 말 기준 142.73~201.36%로 집계됐다. 은행별로 보면 하나은행이 201.36%로 가장 높았고 우리은행 190.38%, 신한은행 180.89%, 농협은행 155.32%, 국민은행 142.73% 순이었다. 5대 은행 모두 금융당국 규제 기준인 80%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다만 지난해 말(129.14~215.82%)과 비교하면 일부 은행의 비율은 소폭 낮아졌다. 최근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외화 자산의 원화 환산 규모가 확대되고 외화 조달 여건이 변동성을 보인 영향이 일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외화 LCR은 향후 30일 동안 예상되는 외화 순유출액에 대비해 은행이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고유동성 외화자산을 얼마나 확보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비율이 높을수록 외화 유동성이 안정적이라는 의미로 은행의 외화유동성 충격 대응 능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안정적인 관리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이 외화 유동성 관리에 긴장하는 배경에는 최근 환율 변동성 확대가 있다. 환율 변동성이 커질수록 외화 자산과 부채의 원화 환산 규모가 빠르게 변하면서 외화 LCR 비율 관리 역시 까다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환율은 중동 지역 긴장 고조 속에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원·달러 환율은 지난 3일 야간 거래에서 한때 1500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선 것은 2009년 3월 12일 이후 처음이다.
환율 종가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섰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오후 3시30분 기준 전 거래일보다 19.1원 오른 1495.5원에 마감했다. 주간 종가 기준으로는 2009년 3월 12일(1496.5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장중에는 1498원대까지 올라 1500원선에 근접하기도 했다.
환율 변동성 역시 빠르게 확대되는 모습이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이달 들어 6일까지 원·달러 환율의 일일 평균 변동폭은 13.2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코로나19 충격이 극심했던 2020년 3월(13.8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 관세 충격으로 환율이 급등락했던 지난해 4월에도 변동폭은 9.7원에 그쳤다.
환율 변동성은 금융지주의 자본 건전성 지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환율이 오르면 외화 자산의 원화 환산 가치가 증가해 위험가중자산(RWA)이 확대되고, 이에 따라 보통주자본비율(CET1)이 하락 압력을 받을 수 있어서다.
현재 주요 금융지주의 CET1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KB금융 13.79%, 신한금융 13.33%, 하나금융 13.37%, 우리금융 12.9% 수준으로 통상 시장이 안정권으로 보는 12~13%대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시장에서는 환율이 10원 상승할 때 CET1 비율이 평균 0.01~0.03%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환율 급등이 이어질 경우 자본정책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은행권은 외화 유동성 관리 수위를 높이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KB금융은 환율·금리·유가 등 주요 시장 지표를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있으며, 신한은행은 위기관리협의회를 통해 외환시장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하나금융도 그룹위기상황관리협의회를 열어 환율 급등에 따른 리스크 점검에 나섰다. 우리금융 역시 그룹 차원의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해 외화 유동성과 자금시장 상황을 점검 중이다. NH농협은행도 환율과 금융시장 지표 모니터링을 강화하며 외화 자금 유출 가능성 등에 대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은행권에서는 현재 외화 유동성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 우세하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이후 외화 유동성 규제가 강화되면서 은행들이 보수적으로 외화자금을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환율이 일정 수준에서 안정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최근처럼 변동성이 커지면 기업이나 금융회사 모두 자금 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워진다"며 "다만 국내 은행들은 국제 기준보다 높은 수준으로 외화 유동성을 관리하고 있어 당장 유동성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신용평가사들도 최근 환율 변동성 확대에도 국내 은행권의 건전성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김석우 나이스신용평가 금융SF평가본부 수석연구원은 "강달러 기조가 유지되더라도 국내 은행들의 외화 유동성과 자본적정성을 고려하면 신용등급에 영향을 줄 수준의 충격 가능성은 낮다"며 "최근 은행들이 보수적으로 외화 유동성을 관리해온 점을 감안할 때 환율 상승이 은행 건전성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중동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환율과 유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금융시장 전반의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전쟁 확산 여부와 호르무즈 해협 상황 등에 따라 환율 상단이 1500원대 중후반까지 열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란 전쟁 격화로 달러·원 환율이 야간 거래에서 1500원을 웃돌았다"며 "지정학적 갈등이 4~5주가량 이어질 경우 3월 환율은 1450~1550원 범위에서 등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WTI 국제유가가 배럴당 90~100달러 수준까지 상승할 경우 환율 상단이 더 높아질 수 있다"며 "1500원이 한 번 돌파되면 뚜렷한 저항선을 찾기 어려운 만큼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유진아 기자 gnyu4@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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