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봄빛 가득한 대정에서 추사를 만나다
시련은 지나가고, 견디는 힘은 결국 꽃이 된다
제주 서남부 대정은 추사 김정희가 8년 3개월간 유배 생활을 한 곳이다. 국보 ‘세한도’를 완성한 그의 고독과 예술, 그리고 아내를 향한 절절한 사랑이 깃든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 추사의 유배길을 따라 걸어보자. 이 여정은 단순한 역사 탐방이 아니라, 시련을 예술로 승화시킨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제주의 봄이 전하는 고요하고 깊은 울림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다.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면, 1840년의 추사 김정희에게는 지독한 삭풍만이 몰아치던 긴 겨울이었을 것이다.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였던 명문가에서 태어나 탄탄대로를 걷던 천재 예술가. 하지만 정쟁의 소용돌이는 그를 한순간에 세상의 끝으로 밀어냈다. 그의 나이 쉰다섯 되던 해, 그는 이곳에 유배됐다. 조정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위리안치’, 즉 가시울타리를 두른 채 그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중형이었다.

고독이 낳은 걸작, 세한도
3월 초, 대정의 들녘을 걷다 보면 추사가 맞닥뜨렸을 그 막막한 고독이 공기 중의 냄새로 전해지는 듯하다. 뭍에서는 이제 막 꽃소식이 들려올 시기지만, 이곳의 3월은 여전히 겨울의 잔재와 봄의 전령이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추사는 이 계절을 가시 돋친 나무 안에 갇혀 보냈다. 거친 음식과 낯선 습기는 그의 몸을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8년 3개월이라는 긴 유배 기간은 추사에게 고통인 동시에 예술적 완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추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책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예술적 구원의 손을 내민 이는 역관이었던 제자 이상적이었다. 우선(藕船)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마다 귀한 최신 서책들을 구해 바다 너머의 스승에게 보냈다. 권력에서 밀려난 노학자에게 여전히 변치 않는 예를 갖춘 것이다.


유배지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아마도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소식을 전하기도, 받기도 어려운 섬에서 추사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썼다. 1842년 11월에도 추사는 아내 예안 이씨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그 편지가 도착하기 하루 전,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아내의 죽음을 모른 채 “당신이 봄날 내내 바느질했을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했고, 나는 당신의 정성을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 놓았소”라고 적었다. 이 문장은 언제 읽어도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만든다.
부치지 못한 마음은 썩지도 않고 그의 가슴에 고여 있었을 테다. 추사관에서 마주하는 그의 서찰들은 서예의 대가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한 남자의 젖은 어깨를 보여준다. 3월의 동백이 유독 붉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쏟아냈을 그리움이 꽃잎마다 배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주의 동백은 꽃송이째 툭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단호하게 끝난 연애의 마지막 장면처럼 쿨하면서도 애잔하다.

하지만 그 수수함이야말로 추사의 미학과 가장 닮아 있다.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일부러 지그재그로 설계해 험난했던 추사의 삶과 유배길을 공간으로 표현했다. 추사기념홀을 포함한 3개의 전시실에는 편지, 현판 글씨, 서화 100여 점이 전시돼 있어 그 예술 세계를 차분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유배지를 둘러봤다면 추사의 유배길을 걸어보는 것이 좋다. ‘추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조성된 이 길은 인연, 집념, 사색의 3개 코스로 나뉜다. 추사유배지에서 출발해 동계 정온 유허비, 정난주 마리아 묘, 단산, 세미물, 대정향교를 거쳐 다시 유배지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다. 대정읍과 안덕면에 걸쳐 조성된 길을 따라 걸으면 추사가 기거했던 공간들이 현재의 풍경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대정읍에서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안덕면 대평리에 이른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난드르’였다. ‘평평하고 긴 들판’을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지금의 대평(大坪)이다. 마을 앞 바다에서 용왕이 다스리는 들판이라 하여 ‘용왕 난드르’라고도 불렸다.
이 마을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자연스레 향하는 곳이 박수기정이다. ‘박수’는 샘물을, ‘기정’은 벼랑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실제로 이 절벽 아래 암벽에서는 사계절 내내 맑은 샘물이 솟아오르는데, 피부에 좋다 하여 예로부터 백중날 물맞이 행사가 열리던 명소이기도 하다.

박수기정은 제주올레 9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대평포구에서 화순까지 이어지는 6.7킬로미터 코스로 거리는 짧지만 난도가 높아 3~4시간이 걸린다. 절벽 위 트레킹 코스에서는 유채꽃이 물결치는 산방산 자락부터 쪽빛 바다, 마라도와 가파도까지 시선이 닿는다.

형제섬, 봄 새벽을 깨우는 일출
대평리에서 해안을 따라 사계 포구 쪽으로 이동하면 바다 위에 나란히 솟은 두 개의 섬이 보인다. 포구에서 1.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형제섬이다. 큰 섬인 본섬과 작은 섬인 옷섬으로 이루어진 이 두 섬은 형제처럼 마주 보고 서 있다고 해서 형제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옷섬의 주상절리층은 지질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곶자왈, 봄빛이 더 짙어지는 숲
제주 서남부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곶자왈이다. 제주 특유의 용암 지대에 형성된 이 숲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독특한 생태계를 품고 있다.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한 숲에 공존하는 것은 제주 곶자왈에서만 볼 수 있는 경이로운 광경이다.

저지오름에서 바라보는 제주 서쪽
곶자왈을 걷고 나면 한경면 저지마을의 저지오름으로 향해보자. 해발 239미터로 그리 높지 않지만 정상 전망대에서 펼쳐지는 조망만큼은 제주 어느 오름에도 뒤지지 않는다. 차귀도와 비양도, 산방산,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뒤로는 한라산이 크게 버티고 서 있다.

4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저지마을은 지난 2012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오름을 내려온 뒤 마을 골목을 천천히 걷는 것도 이 여행의 마무리로 나쁘지 않다.

3월 초의 제주는 아직 유채꽃이 만개하기 전이다. 하지만 화려한 노란빛이 세상을 덮기 전, 들판 곳곳에 숨어 있는 연둣빛 생명력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추사가 ‘세한도’에서 보여준 그 절제된 미학처럼, 3월의 제주는 과하지 않아서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이제 대정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세한도’의 소나무 한 그루와 추사가 아내에게 썼던 절절한 문장들이 남았다. 인생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3월의 대정은 말해주는 듯하다. 시련은 지나가고, 견디는 힘은 결국 꽃이 된다고.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산방식당’의 밀면도 빼놓을 수 없다. 쫄깃한 면발과 멸치로만 우려낸 육수의 깔끔함은 추사체의 칼칼한 필치를 닮았다. 곁들이는 수육 한 접시는 여행자의 허기를 든든하게 채워준다.
[글·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20호(26.03.1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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