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건국 공신 장량(張良), 물러나 신선 되다

기호일보 2026. 3. 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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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용 한국외국어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홍문(鴻門)에 들어서면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와 유방이 연회를 베푼 곳이라는 큰 비석이 있고 장량이 유방, 항우 등과 함께 즐비하게 늘어서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문승용 한국외국어대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
천하장사였던 항우가 뛰어난 무예 실력에 자만하였던 것에 비하여 평민 출신이나 다름없었던 유방은 미천한 출신으로서 자신의 결점을 잘 알고 있었고 항우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부하 장수들과 여러 인재를 두루 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한나라를 열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유방의 성공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이가 장량(張良), 한신(韓信), 소하(蕭何)이다. 이들을 한초삼걸(漢初三傑)이라 부른다.

그 가운데 장량은 본래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으로서 젊은 시절 나라를 잃고 떠돌면서 시황제를 암살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지방을 순시하고 있던 시황제를 죽이기 위해 장량이 고용한 무사는 120근짜리 철퇴를 준비해 놓고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시황제의 수레를 내리쳤다. 마침 시황제가 타고 있지 않은 수레를 공격하는 바람에 시황제는 요행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어느 수레에 타고 있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 황제가 타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수레 여러 대가 함께 다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량은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도망 다니던 신세가 되었고 뒷날 유방을 만나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항우와의 싸움에서 장량은 작전을 짜는 일에서 유방의 머리가 되어 주었고 한신은 장군으로서 전투에 나가 항우에게 맞서 싸우는 데에 절대적인 공훈을 세웠으며 소하는 필요한 물자와 병사 등을 마련하는 등 안살림을 책임졌다. 이들이 없었다면 유방의 승리는 보장할 수 없었다.

한(漢)나라가 건국된 다음 많은 개국 공신들이 일종의 용도폐기를 당하여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지만 장량은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기고 지방으로 물러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가 은거하였던 곳이 요즘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호남성 북서부에 있는 장가계(張家界)인데 장가계는 '장(張)씨 집안의 지역'이라는 뜻이다.

장량이 장가계로 물러나 있던 때 한나라 황실에서는 유방의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 조짐이 있었다.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가 다음 후계자가 될 아들 유영(劉盈)을 낳았지만 본디 호탕하고 여자를 밝히던 유방은 태자 유영의 사람됨이 너무 어질고 연약한 것이 자기를 닮지 않았다고 하여 유영을 태자에서 폐하고 자신이 아끼던 척부인(戚夫人)에게서 얻은 여의(如意)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때 여태후는 은거해 있던 장량을 불러와 자기 아들을 폐하려는 유방의 계획을 저지하였다. 유방이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던 장량의 충언 덕분에 유영은 태자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유방이 죽은 다음 제2대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2대 황제 혜제(惠帝)이다. 이처럼 장량은 한나라 건국 초기 적통을 황제의 후계자로 세우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요즘 극장가에서 화제인 '왕과 사는 남자'에서 유지태가 악역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는 한명회(韓明澮) 역시 장량을 본받으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정도전처럼 한명회는 당시 단종을 보좌하고 있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처치하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많은 대신과 학자들을 죽여 정권을 장악하고는 수양대군이 세조에 오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지만 한명회가 정권을 잡아 자신의 주군을 왕좌에 오르게 했던 것에 절대적인 공훈을 세운 것은 장량에 비교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의 마지막 삶은 장량과 확연히 다르다. 자신이 할 일을 다하고 현실 정치에서 물러나 목숨을 보전하였던 장량은 훗날 신선이 되었다고 알려진 것에 반해 한명회는 이후 30여 년 동안 권신으로서 마음껏 권력을 누렸으나 죽은 다음 연산군 시절 무덤에서 시신이 끄집어내어져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해골은 거리에 걸리고야 말았다.

오늘날에도 끝 간 데 없이 권력의 길을 내닫다가 뒷끝이 좋지 않은 정치인들을 흔히 보는데 현실 정치에서 물러날 줄 알아 평온하게 삶을 마칠 수 있었던 장량처럼 만약에 한명회가 노자 『도덕경(道德經)』에서 "충분한 줄 알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험하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말을 잘 되새겼더라면 결국 죽어서까지 비참한 꼴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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