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화된 ‘가격 통제 카드’, 29년 만에 소환?…석유가격 상한제 초읽기
산업장관 “준비 거의 마쳐”…공급 절벽·재정 부담 등 부작용 우려도
(시사저널=조유빈 기자)
중동 전쟁으로 기름값이 치솟으면서 정부가 29년 만에 석유가격 상한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1997년 석유가격 자유화 이후 사실상 사문화된 정책을 '초강수 카드'로 다시 꺼내 유가 상승 폭을 줄이겠다는 의도다. 정부는 이미 제도 시행과 관련한 준비는 완료됐으며, 시장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시장 자율에 맡겨졌던 가격을 통제하게 되면 공급 부족과 재정 부담 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산업부 장관이 최고액 설정 가능
이재명 대통령은 9일 청와대에서 열린 '중동 상황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최근에 과도하게 인상된 석유제품에 대해 최고 가격제를 신속하게 도입하고 과감하게 시행해야겠다"고 강조했다. 산업통상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석유가격 상한제 도입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황이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전날 시장 상황을 보면서 대응하고, 필요할 경우 제도를 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석유가격 상한제는 정부가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의 최고 판매가격을 정해 그 가격 이상으로 팔지 못하게 제한하는 정책이다. 상한선을 설정하기 때문에 유가가 급등할 경우 가격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제23조에 따르면, 석유의 수입·판매 가격이 현저히 등락하거나 등락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국민 생활과 국민 경제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산업통상부 장관이 석유 판매가격의 최고액 또는 최저액을 정할 수 있다. 위반 시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고, 초과 수익은 정부가 환수한다.
그러나 석유가격 상한제는 사실상 국내에서 사문화된 제도다. 국내 석유제품 가격은 1993년까지는 정부가 직접 고시했고, 1994년에는 국제 시세와 연동하는 유가연동제를 도입했다. 1997년부터 석유가격이 자율화됐다. 정유사별·대리점별·주유소별로 판매자가 석유제품 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해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장에 의해 가격이 움직이게 된 1997년 이후 석유가격 상한제가 시행된 사례는 없었다. 그동안의 가격 안정책은 판매 가격 공개나 시장 경쟁 유도 방식으로 이뤄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국제 유가 급등 당시에도 정부는 유류세 인하, 유가 환급금 제도, 유통 구조 경쟁 강화 등 시장 중심 정책으로 대응한 바 있다.

공급 절벽 등 우려…재정 부담 가능성도
석유가격 상한제가 시행될 경우 급격한 유가 상승을 막을 수 있지만, 시장 가격 통제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역과 주유소마다 천차만별인 제품 석유가격 기준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도 석유제품 가격 상한선 지정 검토를 지시하면서 "전국 단위 일률 적용이 어렵다면 지역별이나 유종별 방식 등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 지정해 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특히 중동 전쟁 상황에 따라 유가가 더 오를 수 있는 상황인 만큼, 가격 상승세를 통제했다가 정유업계 등의 손실이 커지면 공급 절벽이 올 수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는 구매대란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 재정 부담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석유사업법에 따르면, 가격 통제 과정에서 정유·유통업계가 손실을 보게 될 경우, 정부가 이를 보전하기 위한 재정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있다.
산업부는 석유가격 상한제와 관련해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시행 방안을 설계 중이다. 김 장관은 이날 중동 상황 대응 본부 회의에서 "석유가격 급등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국제유가 상승에 편승해 민생물가 안정에 역행하는 행위에 대해 엄정히 대처할 것"이라고 했다. 범부처 석유시장 점검단을 구성해 불법 행위를 엄중히 단속하고 있으며, 2000여 개 주유소를 대상으로 특별 현장점검도 실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장관은 정유사들에게 직영주유소 판매가격 안정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알뜰주유소 3사에는 전국 평균 가격보다 저렴하게 석유제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독려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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