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8년 만에 LPGA 우승한 이미향의 '빈 모자 드라마'

김종석 기자 2026. 3. 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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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스폰서 없이 블루베이 LPGA 정상
-후원 공백 속 투어 생활… 연간 후원금 1억 원 이상 감소
- 이소미·임진희도 같은 길… 먼저 도전, 성적으로 존재감 입증
이미향이 LPGA투어에서 8년 만에 정상에 올랐다. 메인스폰서가 없는 그는 회사 로고가 아닌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다. LPGA 페이스북

프로 골프 대회에서 선수 모자는 단순한 장비가 아닙니다. 모자 정면에 붙는 로고는 선수의 시장 가치와 후원 구조를 상징합니다. 골프 팬들이 현장 직관이나 TV 중계를 통해 가장 먼저 보는 명당입니다. 모자 중앙에 새기는 메인스폰서 로고는 골퍼의 자존심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무려 8년 7개월 만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춘 이미향(33)의 모자 정면에는 작은 삼지창 모양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미향은 8일 중국 하이난성 젠레이크 블루베이 골프코스(파72)에서 끝난 블루베이 LPGA에서 감격스러운 주인공이 됐습니다. 

  2017년 7월 31일 스코티시 오픈 이후 개인 세 번째 우승을 달성한 그는 이번 시즌 한국 선수 가운데 첫 번째 LPGA투어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우승 상금 39만 달러(약 5억8000만 원)을 받아 시즌 상금 3위까지 점프했습니다.

  이미향의 '삼지창'은 2015년 국내에서 창립한 토털 패션 브랜드 '베루툼'의 로고입니다. 유명 연예인이 이 브랜드 모자를 착용하면서 '셀럽 모자'로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지난해부터 메인 스폰서 없이 투어 활동을 하는 이미향은 대신 이 회사 모자를 쓰고 출전한 겁니다. 메인 스폰서가 없으면 거액의 후원금을 기대하기 힘들어 투어 생활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위축될 수 있습니다. 반면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둬 다시 대형 계약을 성사해야 한다는 절박한 각오가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합니다. 이미향 같은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까요. 이미향은 메인스폰서가 사라지면서 연간 후원금이 1억 원 이상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대회 우승 후 이미향은 6개월 넘게 자신을 괴롭히는 부상 때문에 진통제 없이는 잠들 수 없는 상황을 견뎌냈다는 사연을 공개했습니다. 그는 "이런 기분이 정말 오랜만이다. 실감이 안 난다. 경기 중 포기할 뻔했지만, 캐디가 '넌 싸울 수 있다'라고 해줬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해낼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이미향. LPGA 페이스북
LPGA 2부 투어에서 상금왕을 차지한 이미향과 대회 때마다 늦둥이 딸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 이영구 씨. 볼빅 제공

이미향은 프로 전향 후 국내 무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2012년 LPGA 2부 투어에서 신인상을 받은 뒤 이듬해 본격적으로 LPGA 1부 투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미향의 모자 측면에는 국산 골프공 브랜드 '볼빅' 로고가 있습니다. 볼빅은 이미향이 중학생 때부터 오랜 세월 용품 지원 및 메인스폰서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불황의 그늘이 골프업계에 깊게 드리워지면서 볼빅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오랜 의리를 생각해 볼빅은 어려움에도 이미향과 서브스폰서 계약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미향이 쓴 모자 브랜드 베루툼은 '창'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고대 그리스 여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무기를 모토로 형상화했습니다. 이미향이 삼지창의 기운으로 온갖 역경을 이겨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미향은 8년 넘게 우승이 없다가 이번에 정상에 등극하면서 메인스폰서를 다시 찾을 기회도 잡게 됐습니다.

  이미향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 온 것이 보상받은 것 같다. 나 자신에게 큰 자신감을 줬다. 많은 분이 나를 응원해 줬고 그 덕분에 끝까지 집중할 수 있었다"라고 기뻐했습니다.

민 모자를 쓰고 LPGA투어 첫 승을 장식한 이소미. 그와 우승을 합작한 임진희도 스폰서가 없이 투어 활동을 하다가 계약했다. 

이미향을 보면서 이소미가 떠올랐습니다. 이소미 역시 지난해 6월 LPGA투어 다우 챔피언십에서 임진희와 짝을 이뤄 '빈 모자'로 우승했습니다. 이 대회는 LPGA에서 유일한 2인 1조로, 포섬과 포볼 방식이 번갈아 진행되는 독특한 포맷입니다. 이소미는 스폰서 없이 시즌을 시작했지만 결국 LPGA 첫 우승을 만들어냈고 이후 신한금융그룹과 후원 계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우승을 합작한 임진희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는 기존 후원사의 경영 상황 변화로 시즌 초반 메인 스폰서 없이 LPGA투어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모자 중앙이 비어 있는 상태로 꾸준한 상승세를 유지한 그는 지난해 시즌 도중인 4월 이례적으로 신한금융그룹과 계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남 완도 출신인 이소미는 제주도 출신인 임진희와 '섬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LPGA투어 우승 후 신한금융그룹과 계약한 이소미와 이 회사 진옥동 회장.  

이소미는 계약 당시 "후원을 결정해 준 신한금융그룹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고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소미는 우승 기념으로 임진희와 사인을 남겨 보관하고 있던 다우챔피언십 18번 홀 깃발을 신한금융그룹 진옥동 회장에게 전달했습니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이소미 선수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도전 정신으로 성장해 온 선수"라며 "신한금융은 꾸준한 성실함으로 글로벌 무대에서 묵묵히 활약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며, 한국 골프의 미래와 도전하는 모든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과거 양희영도 직접 새겨 넣은 '스마일' 모자를 쓰고 출전하다가 2023년 메이저 대회인 KPMG 위민스 여자 PGA 챔피언십 우승을 계기로 우리은행과 계약한 뒤 현재 키움증권의 메인 후원받고 있습니다. 

골프 여왕으로 불리는 박인비도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당시에는 메인 스폰서가 없어 LPGA 로고가 붙은 모자를 썼다.

소싯적 얘기지만 박세리도 메인스폰서가 없던 시절에 지인이 하는 와인 수입 업체 로고를 달고 출전해 우승한 적이 있죠. 박인비가 2008년 LPGA 첫 우승을 US여자오픈에서 장식할 당시 모자에는 LPGA 로고가 박혀 있었습니다. 박지은은 부친의 사업체인 식료품 업체 로고를 달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 큰 후원을 받다가 LPGA투어에 건너가면 후원이 끊기는 일도 많습니다. 한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는 "LPGA는 세계적 상표 노출 효과가 크지만, 한국 기업으로서는 국내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마케팅 효과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라며 "그래서 기업들이 KLPGA 중심 후원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골프 선수 후원을 많이 하는 건설사의 경우에는 해외 진출하게 되면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미국 무대에 처음 진출하는 선수의 경우 기업들이 일정 기간 성적을 지켜본 뒤 후원 계약을 체결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해야 비로소 후원 제안이 들어오는 겁니다.

'스마일' 그림을 새겨 넣은 모자를 쓰고 우승한 양희영.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선수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로고 없는 민 모자를 쓰고도 우승을 만들어낸 이미향, 스폰서 없이 투어 첫 승을 거둔 이소미, 후원 공백을 딛고 정상에 선 임진희의 모습은 그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모자 정면 공간은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선수의 도전과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골프장에서 가장 중요한 로고는 기업의 이름이 아니라 선수의 실력일지도 모릅니다. 민 모자가 선수의 투지와 성적으로 채워질 때 그 이야기는 더 강렬해집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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