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은 어떻게 죽었고, 엄흥도는 어떻게 시신을 수습했나

김현경 2026. 3. 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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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만 돌파 ‘왕사남’ 역사적 배경 진실
엄흥도가 단종 죽음 도운건 ‘작가적 상상’
“통인이 자처” ‘연려실기술’ 기록과 비슷
금성대군·혜빈 양씨 등도 비참한 최후
단종 기리는 발길 장릉·청령포 줄이어
‘조선왕조실록’·‘단종애사’ 서점서 인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과 엄흥도. [쇼박스 제공]

“나는 이제 어디로 갑니까….”

1457년 조선. 숙부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머나먼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로 유배를 떠나는 이홍위. 최고 권력자인 왕에서 하루아침에 군으로 신분이 강등되고 목숨까지 잃게 됐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6살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왕으로 기억되는 단종의 이야기다.

그로부터 569년이 흐른 지금,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단종을 다시 소환했다. 어린 왕 단종과 유배지에서 그를 감시하던 호장 엄흥도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개봉 30일 차인 6일 기준 누적 관객 수가 1000만명을 돌파할 정도로 전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단종의 서사는 보통 살기가 가득 찬 세조와 약한 어린 왕의 구도로 그려지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어린 왕과 함께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엄흥도를 전면에 내세워 기존의 작품들과 차별점을 갖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해졌고, 영화에 담기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단종 영정

11세 즉위·16세 사망…‘비운의 왕’ 단종

단종은 조선 시대 27명의 왕 중 가장 정통성을 가진 왕이었다.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세손,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그야말로 ‘로열 패밀리’였다.

하지만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자마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문종도 즉위 2년 만에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단종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다. 성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해 줄 가족이 없었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그나마 돌봤으나 힘은 부족했다.

형인 문종이나 동생들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않았던 수양대군이 왕권을 넘본 것은 이처럼 어린 조카를 지켜 줄 든든한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종이 살아 있을 때는 살갑게 굴었지만, 형이 죽자 야욕을 드러냈고,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단종을 폐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산군으로 신분을 강등하고, 외부와 차단된 산골 마을로 유배를 보낸 뒤 목숨까지 빼앗은 것은 자신이 벌인 쿠데타가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본인이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 사회에서 특별한 과오가 없는 왕을 끌어내린 사례는 과거의 다른 나라에서는 물론, 그 이후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엄흥도 영정

유배 온 어린 왕을 만난 남자, 엄흥도

그렇다면 ‘왕과 사는 남자’의 또 다른 주인공 엄흥도는 누구일까. 엄흥도는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다. 호장은 조선 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마을의 모든 향리가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대체로 여러 대에 걸쳐 직이 세습됐고, 엄흥도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호장을 지낸 집안 출신이었다.

영화에서는 엄흥도가 먹고 살기 힘든 마을 사람들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유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사실 그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등 관에서 편찬한 공식 사료에는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실 정도만 간략히 기록돼 있고, 두 사람의 만남이나 대화 등 구체적 상황에 대해선 야사나 전설로 내려오는 내용이 전부다. 그도 그럴 것이 세조가 통치하던 당대에는 단종을 역적으로 규정했기에 단종과 관련된 것은 기록은 물론, 언급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흥도와 단종의 만남은 후일 엄흥도의 가문 내에서 구전으로 전해진다. 영월로 유배를 온 단종은 어느 날 사육신들을 만나는 꿈을 꾼 뒤 슬픔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곡소리를 들은 엄흥도는 왕이 계신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 청령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단종을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그는 이후 매일 단종을 찾아갔다. 1900년 엄흥도의 후손 엄주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단종은 자결했다? 사실 역사 기록은…

‘왕과 사는 남자’에서 관객들을 가장 많이 울리는 클라이맥스 부분은 단종이 죽는 장면이다. 죽음만큼은 세조의 사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던 단종은 엄흥도에게 자결을 도와 줄 것을 부탁하고, 엄흥도는 고뇌와 슬픔 속에 왕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보낸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에서 가장 절묘하면서도 상상력이 가장 크게 발휘된 부분이다. 단종이 어떻게 승하했는지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보니 그 빈칸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가득 채운 것으로 보인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의 죽음을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서 졸(卒)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나온다. 하지만 후대의 실록이나 다른 기록을 보면 이는 세조가 자기 잘못을 덮고 미화하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도록 명했고, 단종은 결국 타살당했다는 데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다만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이 사약이었는지, 교살이었는지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약을 거부하거나 효과가 미치지 않아 교살로 죽이는 경우도 있어 단종도 그랬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숙종실록’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도착했으나 머뭇거리면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단종을 수행하던 하인이 나서 교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때 앞에서 늘 모시던 공생 하나가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가, 즉시 아홉 구멍으로 피를 쏟고 죽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모시던 통인(시중 드는 사람)이 단종을 죽이는 것을 자처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자리 뒤로 가서 목에 걸고 창문으로 끈을 잡아당겼다”는 대목이 있다. 영화에서 단종이 죽음을 맞는 장면과 비슷하다. 실제로 영화를 만든 장항준 감독은 이 기록을 참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엄흥도가 단종의 죽음을 도왔다는 설정은 완전한 허구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기록만 있고, 실제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통인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하지만 장 감독은 ‘다른 기록 속의 두 사람이 혹시 같은 인물이라면’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둘을 하나로 합쳤다고 한다. 그 결과 가장 의지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부탁해야 했던 왕과,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던 사람이면서도 죽음에 이르게 해야 했던 남자의 절절한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영월 장릉

버려진 단종 시신, 목숨 걸고 수습한 엄흥도

앞서 ‘세조실록’의 주장과는 달리, 후대의 여러 기록에서는 단종이 살해당한 후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연산군일기’에는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야사를 모은 ‘아성잡설’이나 ‘축수록’에는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엄흥도는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말라’는 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줬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59년 후인 1516년 ‘중종실록’에서다. 중종의 어명을 받은 우승지 신상이 영월에서 단종의 무덤을 찾아 제사 지내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했다.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스럽게 여긴다”고 적혀 있다.

조선 후기 ‘현종실록’에서는 “노산군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 고을의 향리 엄흥도가 곧 가서 곡하고 스스로 관곽을 마련하여 거두어 묻었다”고 언급했다.

단종을 지키려던 금성대군·혜빈 양씨의 최후는

단종을 지키려 했던 3인방, 즉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 등도 모두 세조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금성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모반 혐의로 여러 곳에 유배된 후 영월과 멀지 않은 순흥에 안치됐다. 영화의 내용처럼 그곳에서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했으나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밀고로 인해 세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에 결국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도 “내 임금은 북쪽에 계신다”며 세조가 있는 한양이 아니라 단종이 있는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는 민담이 내려온다.

세조의 숙청 과정에서 일어난 정축지변은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군사들이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해 30리 안에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전해진다. 참수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 리나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로, ‘피끝마을’로 불리고 있다.

혜빈 양씨는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경혜공주 역시 남편을 잃고 비구니가 된 후 가난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한다.

별점과 추모제…역사의 심판은 계속된다

‘왕과 사는 남자’ 개봉 후 단종의 능인 장릉과 영월 청령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애도의 뜻을 담아 높은 별점이 매겨지고 있다. 영월에서는 ‘단종로’라는 이름의 거리를 조성하고, 매년 단종문화제와 사육신제를 지내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때아닌 ‘조선왕조실록’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광수가 1928~1929년에 쓴 소설 ‘단종애사’도 출간됐다. 반면 세조와 한명회를 기리는 행사는 찾아볼 수 없다. 세조의 능인 광릉과 한명회의 묘에는 별점 테러와 악플이 쇄도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도 역사의 심판은 언젠가는 이뤄지는 것 같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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