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라노] '36주 임신중지' 판결 후 다시 드러난 입법 공백

허시언 기자 2026. 3. 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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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헌법재판관들이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국제신문DB


법원이 이른바 ‘36주 낙태’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병원장과 집도의, 산모에 대해 살인죄를 인정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3부(이진관 부장판사)는 지난 4일 살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병원장 윤 모 씨에게 징역 6년과 벌금 150만 원을 선고하고, 범죄수익 약 11억5000만 원도 추징했습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 심 모 씨는 징역 4년, 산모 권 모 씨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각각 선고했죠. 산모는 살인죄의 공범이 인정됐습니다. 윤 씨에게 환자를 소개하고 알선비를 챙긴 한 모 씨 등 브로커 2명은 각각 징역 1년,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번 사건은 2024년 6월 권 씨가 임신 36주 차에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다며 그 과정을 유튜브에 올리면서 시작됐습니다. 영상을 두고 살인 논란이 불거지자 같은 해 7월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진정서를 내면서 수사가 개시됐죠. 2019년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현행법상 임신중지는 처벌할 수 없지만, 경찰과 검찰은 태아가 세상 밖으로 나온 뒤 숨졌다고 보고 이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윤 씨와 권 씨, 브로커가 공모해 피해자를 살해했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모든 인간은 헌법상 주체로, 모체에서 갓 태어난 태아에 대한 생명권도 존중돼야 한다”며 “태어난 이상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하고 누구에게도 살해할 권한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숨 한 번 쉬지 못한 채 차디찬 냉동고에서 사망했다”며 “(피고인들의 범행은) 절대적인 가치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으로 피해 회복이 불가능하며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질타했습니다.

권 씨는 법정에서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며 혐의를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미필적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보고 유죄로 판단했습니다. 태아의 심박수가 정상인 것을 알고 있었던 점, 시체 처리에 동의하며 그 절차를 위임한 점, 어떤 과정을 거쳐 사산했는지 관심을 갖지 않은 점 등 의료진이 태아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점을 권 씨가 인식했다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죄 적용이 어려운 사정과 관련해 “태아가 생존 가능한 시점에서 인공 배출돼 살아있는 사람이 된 이상 낙태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살해가 된다”며 “낙태죄와 관계없다”고 못박았습니다.

다만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입법 공백에 따른 혼란 등은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와 관련해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재판부는 권 씨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데 대해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임신·출산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불이익을 얻고 있다”며 권 씨의 상황을 고려해 임신·출산·육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자신과 태아가 불행해질 것이란 생각에 임신중지한 점을 참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범행 책임을 온전히 이들에게 묻긴 어렵다”며 “임신을 초기에 인지하고 국가가 적극 개선하려고 노력했다면 이 사건과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다”고 꼬집었습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형법상 낙태죄는 사라졌으나,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주수 등 명확한 규정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국회에 2020년 말까지 관련 법률을 개정하도록 주문하면서 임신 22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방향의 입법을 권고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임신 14주까지 별도의 요건 없이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건강상의 이유나 강간으로 인한 임신 등 법에 규정된 예외 경우에는 24주까지 허용하는 개정안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서 법안은 국회에서 계류했죠. 그렇게 2021년 1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낙태죄가 사라졌음에도 후속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번 판결로 임신중지와 관련해 입법 공백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여성단체들은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 7년이 지나도록 관련 의료 가이드를 마련하지 않은 정부야말로 이 사건을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는 “보건복지부는 즉각 임신 전 기간에 걸쳐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임상가이드를 마련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와 국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임신중지 접근성을 가로막는 장벽을 없애고 임신중지·출산·양육에 대한 정보·상담·연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라”고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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