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레를 벗고 자유로… 견뎌온 시간의 무게만큼 인생은 아름답다

“사람만 늙은 게 아니고 우리 집 모든 게 늙었다”며 노라노가 혀를 찼다. 빛바랜 소파를 쓰다듬는 손이 갈퀴처럼 울퉁불퉁했다. “80년 전,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미국에 갔을 때 패션 공장 사장이 손부터 보자고 해요. 스무 살이니 반지를 끼면 스르르 미끄러질 만큼 곧고 가느다란데, 사장 왈, 이 손 마디마디에 못이 박이고 매듭이 생겨야 일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하더군요.”
수백만 번 가위질만 나이테로 맺힌 건 아니다. 두 번의 전쟁과 해방, 차별의 시대를 헤쳐온 100년의 분투가 한데 응어리졌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처럼, 열아홉에 강행한 이혼 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해 질주한 삶. 그 응전의 여정을 담은 ‘노라노: 퍼스트 & 포에버’ 전이 3월 21일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개막한다. 백수(白壽)의 비결에 노(老)디자이너는 “안 돼도 그만이라는 ‘건달 정신’의 승리”라며 웃었다.
◇ 이혼, 내 생에 가장 잘한 일
-곧 백수이시다.
“100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내셨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날들을 무사히 살아낸 것만도 다행인데, 하고 싶은 일도 원없이 했으니 축복이다.”
-BTS가 새 앨범 ‘아리랑’의 글로벌 캠페인에서 노라노의 개척정신을 오마주(경의) 한다고 들었다.
“멋지고 훌륭한 청년들에게 나야말로 경의를 표한다.”
-노라노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은 언제일까?
“살면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이 두 가지다. 이혼, 그리고 미국에 우리 옷을 수출한 것.”
-그 당시 이혼은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일이었는데.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주셨다. 스무 살이면 인생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부친이 일제 강점기 때 경성방송국(현 KBS)을 개국한 노창성이다.
“고학해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권위주의, 가부장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남녀, 신분, 직업의 귀천을 떠나 서로 평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분노가 나의 힘’이라고 했더라.
“사람은 쇼크가 있어야 변화한다. 위기와 충격은 찬스를 만들어준다.”
-이혼이 위기이자 기회였을까?
“정신대를 피하려고 열일곱에 치른 조혼이었다. 구습에 매여 독립된 인간으로 살 수 없는 곳에서 한 번뿐인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밥벌이 해야 하니 영어와 타자를 배웠고, 군정청과 미군부대를 거쳐 은행에서 일했다. 파티에서 만난 어느 미국 여성의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 내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기모노로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갔더니 깜짝 놀란 그녀가 유학을 도와줄 테니 디자이너가 돼보라고 권하더라.”
-1947년 여자 홀로 떠나는 유학이었다.
“배웅 나온 식구들은 여의도 비행장에서 통곡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폭격기를 개조한 비행기에 오르면서 이혼녀를 향한 비난과 멸시를 딛고 새 삶을 찾으려면 죽기 살기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고 다짐했다.”
-‘노라 노(NORAH NO)’는 당시 여권을 만들 때 쓴 영문명이다.
“여학교 때 영어로 처음 읽은 책이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다. 주인공 노라처럼 미지의 삶을 개척하겠다는 심정으로 ‘노명자’에서 ‘노라 노’로 이름을 바꿨다. 겁이 없었다(웃음).”

◇ 뉴욕 7번가에 걸린 ‘태극마크’
-디자이너로 가장 뿌듯한 성취가 미국에 우리 옷을 수출한 것이라고 했다.
“옷 만드는 걸 딱 한번 후회한 적이 있다. 6·25로 부산에 피란 갔을 때다. 의약품을 구하기 위해 병원과 미군부대를 오가며 통역을 했는데, 패션이 아니라 의학을 공부했더라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나라에도 도움이 됐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그러다 밀라노가 섬유와 패션 산업으로 이탈리아를 부흥시키는 걸 보면서 희망을 갖게 됐다. 우리 섬유로 우리 옷을 만들어 수출하면 되는 거였다. 패션은 산업이었다.”
-실제로 1973년 뉴욕 삭스백화점에 진출한다.
“어느 날 상공부 장관이 내게 한국 실크를 대중화할 방법이 없느냐고 묻더라. 그래서 ‘먹고 살기도 힘든 한국인은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실크 옷은 입지 않는다, 대신 해외로 수출해보자’고 제안했다. 코트라 지원을 받아 파리 기성복 패션 박람회인 프레타 포르테에 실크로 만든 우리 옷을 출품했고, 삭스백화점 바이어가 350벌을 주문해, 2만 달러 수출 계약이 성사됐다.”
-1년 뒤엔 뉴욕 맨해튼 플라자 호텔에서 패션쇼를 연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모티프로 프린트한 실크 옷이 현지 패션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퍼트리샤 셸턴이라는 유명 평론가는 ‘설명서를 읽지 않았다면 유럽 디자이너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노라노 옷엔 절제된 우아함(well-controlled elegance)이 흐른다’고 리뷰했더라. 그때 알았다. 내가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웃음).”
-뉴욕 7번가 최고급 백화점인 메이시스의 1층 쇼윈도 15개가 노라노 옷으로 도배되는 일대 사건도 벌어졌다.
“배우 율 브리너도 우리 매장에서 아내 옷을 사갔다. 짝퉁이 난립할 만큼 히트한 줄무늬 실크 원피스는 직장은 물론 저녁 파티 자리에서 입어도 될 만큼 실용적이고도 멋스럽다는 평을 받았다. ‘여왕처럼 보이지만 왕의 몸값은 필요없다’는 우리 카피처럼 가격 경쟁력이 높았던 것도 주효했다. 80년대엔 연간 1000만불 이상 수출했다.”
-수출용 옷에는 노라노 로고에 태극 마크를 넣었다던데.
“알고 보면 나 같은 애국자가 없다, 하하하!”

◇ 육영수 여사의 코트 앙상블
-노라노는 국산 옷감을 고집한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그래야 우리 패션 산업이 함께 성장하니까. 고급 원단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방직공장을 훑고 다녔다. 실크는 프린트를 위해 물에 씻어내는 수세(水洗) 과정이 필수인데 당시엔 시스템이 없으니 한강에 돛단배를 띄워 실크 원단을 매단 뒤 수세했다. 직원들과 지금도 그 얘길 하며 웃는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차관을 빌리러 갈 때 육영수 여사가 입은 코트 앙상블도 국산 양모로 만들었다고.
“외국에 돈을 빌리러 가는 일이니 더더욱 우리 옷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주 이시돌 목장에 가서 성직자들이 손으로 짠 트위드 양모를 원단으로 코트와 드레스를 만들어 드렸다.”
-영부인부터 배우, 가수, 연극 의상까지 전방위적으로 옷을 만들었다.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은 노라노의 상징이다.
“최은희, 문희, 조미령, 김지미, 엄앵란, 최지희 등 당대 여배우들은 영화 계약서에 ‘반드시 노라노 의상으로 한다’는 문구를 적었다. 윤복희는 뉴욕 백화점에 걸린 내 옷을 보고 귀국하자마자 찾아왔다. 펄시스터즈는 전낙원 클럽에서 ‘커피 한잔’ 부르는 모습을 보고 율동에 따라 바짓단이 물결처럼 찰랑이는 판탈롱을 만들어줬다. 내가 룸바에 능한 아마추어 댄서였던 게 도움이 됐다(웃음).”
-연극 의상은 돈은 안 됐을텐데.
“그건 내가 좋아서 했다. 예산이 적으니 김동원씨가 연기한 햄릿 옷은 우리 어머니 벨벳 치마로 만들었고, 오셀로 장군 망토는 미군 부대 담요를 구해 만들었다. 햄릿 어머니역의 황정순씨 드레스는 은박지처럼 번쩍이는 미군 무기 포장지로 깃을 세워 달았다. 고맙다며 매일 아침 커피를 사주더라.”

◇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
-1963년엔 일반 여성을 위한 기성복을 출시한다. 스스로 ‘혁명’이라고 했다.
“일하는 여성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옷을 마음대로 골라 입게 하고 싶었다. 맞춤복 만들면서 한국 여성의 평균 사이즈를 통계화해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미우만 백화점에 매장을 연 첫날 모든 옷이 팔려나갔다.”
-‘나는 옷을 통해 여성의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노라노 옷을 입으면 자유롭고 당당해진다고 말할 때 나는 기쁘다.”
-80년대 뉴욕을 사로잡은 K패션의 원조인데, 노라노는 모르고 샤넬만 아는 사람들이 섭섭하지 않나.
“전혀! 나는 태생이 건달이라 출세나 명예에 욕심이 없다. 내가 샤넬보다 잘한 게 있다면 90대까지 옷을 만들었다는 것뿐이다(웃음).”
-1949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계속 활동했으면 어땠을까.
“미국 동료들은 한국에서 전쟁이 날 거라며 귀국을 만류했지만, 나는 가난한 내 나라와 가족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국민소득 57불에서 4만 불로 성장한 코리아의 기적은 나의 성공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대통령을 좋아했나?
“뒤로 갈수록 못 하더라.”
-당대의 여걸들과 교류하셨다.
“박경리 선생은 내가 글 쓰는 작가가 되었어도 성공했을 거라고 하셨다. 김옥길 총장은 여자 혼자 사업을 한다고 날 대견해하셨다. 어떤 남자보다 용감한 이인호 교수와 언론인 장명수, 윤호미씨도 오랜 친구들이다.”
-장수의 비결은?
“욕심을 버리고 반(半)건달로 사는 것. 야망이 많으면 상처를 받고, 그만큼 명도 짧아진다.”
-청년들에게.
“무슨 일이든 열정을 다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지켜보고 손을 내민다. 때로 낯선 길을 선택할 용기도 있어야 한다.”
-인생은 무엇인가?
“견뎌온 시간의 무게만큼 각자의 인생은 아름답다.”
-시계를 되돌린다면?
“1956년 스페인 마드리드. 플라멩코를 공연하는 클럽에서 우연히 프랭크 시나트라를 만났다. 동양 여성이 신기했는지 장미 두 송이를 건네며 어디에서 왔냐고 묻더라. 하필 우리 일행이 부른 택시가 도착해 그곳을 떠나야 했는데,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날이 새도록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웃음).”
-‘노라’로 산 인생은 아름다웠나?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웃음) 열심히 살았고, 지독히도 바빴지만, 난 이 모든 걸 엔조이(enjoy)했다.”
☞노라노
1928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1947년 도미, LA 프랭크웨건 테크니컬 컬리지에서 패션을 공부했다. 1952년 서울 퇴계로에 ‘노라노의 집’을 열고 본격적인 디자이너 길로 들어섰다. 1956년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1963년 서울 명동 미우만 백화점에 최초의 기성복 매장을 열었다. 1973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출품했고, 1978년 뉴욕 7번가에 쇼룸을 개장, 1979년 메이시스 백화점에 입점한 뒤 1층 쇼윈도 15개 전체를 노라노 옷으로 도배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 연1000만 달러의 대미 수출 기록을 세웠다. 백수를 기념한 전시 ‘노라노: 퍼스트&포에버’전은 3월21일~7월16일까지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열린다. 입장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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