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줄 알았는데…서울 꼭대기에서 찾은 정월대보름 잔치상[미담:味談]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정월대보름은 큰 명절이었다. 시골에선 특히 그랬다. 온 마을 사람이 모여 정월대보름 잔치를 벌였다. 잔치의 중심엔 음식이 있었다. 하얀 천막을 커다랗게 치고, 교자상을 깔고 그 위에 온갖 음식이 올라갔다.
지짐이를 지지는 기름 냄새가 마을에 퍼지면, 꼬마 아이들은 참새처럼 그 주위를 옹기종기 둘러쌌다. 커다란 솥에서는 돼지고기가 뽀얗게 삶아졌고, 시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며 고슬고슬한 시루떡이 익어갔다. 여기에 막걸리 한 사발이 더해지면, 쥐불놀이가 밤하늘을 수놓는 정월대보름의 밤은 비로소 흥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잊힌 풍경이 된 대보름 잔치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최근 서울 롯데타워 81층에 자리한 비채나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파인다이닝 셰프들이 모여 정월대보름을 주제로 한 미식 잔치를 열었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셰프들의 요리가 한자리에 모여 조화를 이루며, 잔치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향연의 불꽃을 다시 지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건 비채나의 전광식 셰프다. 그는 평소 친한 소설한남의 엄태철 셰프, 주은의 박주은 셰프와 뜻을 모아 정월대보름의 맛을 담은 특별한 파인다이닝 코스를 선보였다.

이날의 첫 번째 맞이요리로 비채나는 약밥부각을 만들었다. 비채나의 약밥부각은 찹쌀로 만든 전통 간식 약밥을 바삭하게 원통형 부각으로 만든 뒤 그 속을 숙성 한우 채끝 육회로 채워 넣은 한입 음식이다. ‘꼬소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한 바삭한 부각 속 부드러운 육회의 감칠맛, 달콤함, 기름맛의 조화는 식감과 맛에서 손색을 찾기 어려웠다.
닭과 버섯을 우린 육수 베이스에 냉이뿌리와 돼지감자로 맛을 낸 소설한남의 냉이죽은 오세트라 캐비어가 올라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부드러운 죽은 냉이의 은은한 향을 머금고 있었다.
가늘게 썬 줄전갱이를 아이 아이 머리를 땋듯 곱게 꼬아 궁중 여성의 가체(加髢) 형태로 만든 뒤 참외와 오이를 올린 주은의 전갱이회는 먼저 시각적인 환희를 선사했다. 기름진 줄전갱이회와 시원하고 달콤한 오이·참외의 어울림이 입맛을 돋구는 맞이음식으로 최고였다.

두 번째 맞이요리로 나온 비채나의 ‘옹피조개구이’는 통영의 토속 음식 ‘유곽’을 재해석한 음식이다. 짚불로 훈연한 옹피조개와 대게살, 가리비완자에 갑각류와 볶은 고추장으로 양념을 하고 고명으로 지리산 캐비어와 화향초를 올렸다. 짚불 훈연의 불향이 도드라졌으며, 옹피조개의 쫄깃함과 단맛이 느껴졌다. 여기에 갑각류들가 내뿜는 특유의 감칠맛에 미나리기름의 향미가 맛의 밸런스를 잡아줬다.
소설한남의 성게비빔밥은 종지 모양으로 튀겨낸 김부각 안에 새우 약고추장으로 간은 할 비빔밥과 새우살, 성게알을 얹은 뒤 새우간장을 뿌렸다. 이 작은 음식이 응축된 감칠맛을 폭발적으로 뿜어냈다. 그 맛은 정말 오랜 시간 입 안에 멤돌았다. 며칠이 지난 후에도 이따금씩 다시 떠올랐다.
주은의 증편은 폭신하게 찐 메밀증편을 살짝 구워 식감을 더했고, 대추고를 이용한 크림과 트러플을 올려 단맛과 향을 냈다. 트러플의 향과 몽실몽실 증편의 조합이 빵와 떡의 그 어딘가를 느끼게 만들었다.

세 번째로 나온 중심요리로 나온 비채나의 전복선은 무와 다시마와 함께 쪄낸 전복 안에 새우와 가리비 관자, 홍합살로 소를 채웠다. 아래에는 은은한 바다향이 감도는 감태죽을 깔았다. 전복을 잘 사용하기로 유명한 비채나답게 전복의 익힘, 향, 맛이 극상이었다. 사실은 안에 들어간 소가 필요 없다고 느낄 정도. 아래에 딸린 감태죽도 정말 좋았는데, 프렌치 소스와 같은 묵진한 크리미함과 한식 특유의 고소함과 감칠맛이 그릇을 싹싹 긁도록 했다.
소설한남의 대구찜은 뽀얗게 우린 대구 육수에 부드럽게 찐 대구살과 대구살과 줄기콩으로 만든 어묵, 감자옹심이, 무, 미나리를 담았다. 여기에 콩나물과 청양고추 기름, 겨자식초를 뿌려 매운맛과 시원한맛, 신맛 등을 더했다. 대구 육수의 시원한 맛에 겨자식초의 조화가 매력적이었다.
주은의 음식은 예술적인 미감이 계속 돋보였는데, 이번 코스에서 선보인 탕평채도 마찬가지였다. 동부묵으로 빚은 꽃잎 속에 대게살을 채우고 그 위에 각각 돌나물과 취나물, 해방풍, 우엉 나물을 올린 뒤 중앙에 캐비어를 담아 만개한 봄꽃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날의 화룡정점은 정월대보름의 상징적인 오곡밥과 나물을 중심으로 한 반상차림이었다. 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식객을 압도한는 한식 반상의 진수를 선보였다. 비채나는 오곡밥과 두릅 소고기뭇국, 송로버섯 우엉 잡채, 새우 연근전을 맡았고, 주은은 게살무침과 황태 무조림, 나물 5종을 소설한남은 너비아니와 열무김치, 나물 4종을 담당했다.
약한 불에 오랜 시간 사골과 한우 채끝살 무를 우려낸 소고기뭇국은 짙은 육향과 담백함, 감칠맛이 도드라지면서 시원한 맛으로 겉은 수수하지만 맛으로 반전을 주는 한식의 매력을 대표하는 듯 했다. 트러플 우엉 잡채는 레시피를 훔치고 싶은 맛이었는데, 우엉과 칡당면을 함께 볶은 뒤 찹쌀을 갈아 만든 소스에 트러플을 곁들였다. 한우 등심살을 숯불로 구운 너비아니는 부드러운 식감에 숯불향이 기분좋게 베어있었다.
맺음요리로는 상큼한 소설한남의 감귤소르베와 은은한 계피향을 내는 비채나의 곶감 수정과, 제철 쑥을 이용한 주은의 쑥굴레 등이 차려졌다.

정월대보름 잔치는 세월 속에서 점차 희미해졌다. 그러나 음식은 기억을 가장 오래 붙잡는 문화인 듯 하다. 이날 셰프들이 한 상에 펼쳐놓은 요리들은 파인다이닝 코스를 넘어, 잊혀진 잔치 풍경을 현대의 미식 언어로 다시 전달했다.
천막 아래 교자상을 둘러앉던 옛 잔치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펼쳐진 현대의 잔치는 모습은 다르지만 본질은 닮아 있었다. 좋은 음식이 사람을 모이게 하고, 그 자리가 다시 기억이 되는 것. 정월대보름의 둥근 달처럼, 그렇게 잔치의 의미는 시대를 넘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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