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반느’…경록이 경록을 바라보다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작년 겨울, 모락모락 이야기꽃이 피어나던 서울 연남동의 어느 선술집에서, 콧수염을 기른 묘한 눈빛의 신사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잭 블랙의 익살과 잭 니콜슨의 광기,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청년 같은 순수가 섞여 있었다. 살바도르 달리 느낌의 괴짜 천재 같은 수염까지 더해지니,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남았다. 영화 ‘파반느’의 이종필 감독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랜 인연이었다. 2006년, 그는 단편 영화 ‘불을 지펴라’의 섭외 건으로 내게 메일을 보냈었다. 북한에서 록 음악을 동경하던 소년 ‘리경록’이 남한으로 넘어와 겪는 이야기였다. 그 시절 나는 막 군 제대를 하고 크라잉넛 5집 녹음을 마무리하던 때라 정중히 거절 메일을 보냈는데, 마지막 문장이 “남한에서 경록이가”로 끝났다고 했다. 잊고 있었는데, 감독은 그 문장이 유독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비록 그때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한 문장이 세월을 건너 이렇게 우리를 다시 잇게 될 줄은 몰랐다. 이후 거의 20년 만에 첫 만남. 우리 둘은 얼마나 많은 계절을 지나왔고, 또 얼마나 많은 꽃잎을 놓쳐버렸나.
올해 2월, 인터넷에서 고아성 배우와 함께 ‘경록’이라는 이름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얘긴가 싶었다. 검색해 보니 ‘경록’은 이종필 감독의 신작 ‘파반느’의 등장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몇달 전 감독을 만났을 때 이미 촬영은 끝나 있었을 텐데, 그는 영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인 ‘파반느’ 속의 ‘경록’과 현실의 ‘경록이’를 조용히 교차 편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월25일 오전,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도 햇살만큼은 완연한 봄날이었다. 올리브색 커튼을 드리우고 영화 ‘파반느’를 감상했다. 전날 본 티저가 왠지 마음에 남아 이 영화는 아침의 빛 속에서 보고 싶었다. 커튼 너머로 번지는 따뜻한 빛이 나를 감싸주고 응원해 줄 것만 같았다.
오프닝에서 박해준 배우가 시계를 차며 거울을 보는 모습은 영화 ‘아비정전’ 마지막 장면의 양조위를 패러디한 ‘명동콜링’ 뮤직비디오의 경록이를 오마주한 모습이 아닐까, 혼자만의 김칫국을 마시며 피식 웃었다. “경록아 잘 봐! 파반느 안에 네가 있어.” 마치 이종필 감독이 내게 건네는 초대장 같았다. 고아성 배우가 화면에서 “경록씨” 할 때마다 깜짝 놀랐다. 화면 밖의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그렇게 나는 영화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방황하는 청춘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한줄기 빛이자 마법 같은 영화였다. 3명의 주인공이 서로의 어두운 과거를 위로하며 빛이 되어주는, 말 그대로 따뜻한 청춘 영화이다. 얼마나 그리웠을까? 이 초록 청춘의 빛이. 반가웠다.
영화에는 책 향기처럼 희망을 품은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하다. 극중 요한은 비록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웃음과 희망을 전하는 채플린 같았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영원할 거라는 오해.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이해하는 것. 결국 사랑은 상상하는 일이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그 무엇이다.” 요한의 말은 사랑의 시작과 절망 끝에 초록색 희망의 마침표를 찍는다.
‘미정’ 역을 맡은 고아성의 연기는 오래됐지만 잘 관리되어 윤이 나는 바이올린 같았다. 바람이 현을 스치듯 맑은 음이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미정의 방에 걸린 뭉크의 ‘사춘기’ 그림처럼 어딘지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큐피드의 화살 같은 소독차 연기에 취한 듯, 사랑에 빠진 연출은 마법같이 신비로웠다. “너만 특별하다는 착각을 버려!”라는 담담한 카운터펀치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경록’ 역을 맡은 문상민이라는 배우는 아직 하얀 여백이 많이 남아있는 도화지 같았는데,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 그건 여백이 아니라 순수라는 하얀 물감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서로 영혼의 빛을 밝혀주는 거야. 그렇게 빛나는 거야”라고 사랑을 정의한다. 결국 상처를 주는 것도, 어둠을 비춰주는 빛도 사람이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짙게 남았다. 상처를 감싸주는 반창고 같은 영화이자 봄을 기다리는 어느 날 초록빛이 마음을 비춰준 영화 같았다. 끝으로 스무살의 경록에게 전하고 싶다. 아직도 방황하고 있다고, 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고. 그리고 영화 속 미정, 요한, 경록에게, 또 이종필 감독에게 전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청춘 자체가 빛이었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인생 자체가 빛이었다고. 신이 보시기에 우리네 삶은 크리스마스 전구의 불빛들처럼 반짝이는 것들이었다고.
-남한에서 경록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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