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과 불안함 둘 중에 고른다면 [독서일기]
정은혜 지음
아라의정원 펴냄

행복에 대한 책은 많다. 이 주제만큼 부지런히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분야도 없다. 그래서 ‘행복 산업’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행복에 관한 무수한 정의 가운데,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거나, 어떤 상태를 말하기보다 행복하다는 제스처를 반복하는 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테면, 윤항기의 노래 ‘나는 행복합니다’를 자꾸 반복하면 행복해진다는 거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노래를 불러요 우리 모두 다 함께/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이 노래를 불러서 당신이 잠시라도 행복해졌다면, 이것이야말로 수행성(遂行性ㆍperformativity)의 좋은 사례가 아닌가.
긍정심리학은 행복을 삶이 성취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심리 조작을 중시한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라는 행복의 수행적 속성을 학문적·실증적으로 다듬은 것처럼 보이는 긍정심리학은 행복을 개인의 심리와 인간관계의 문제로 축소한다.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행복보고서〉는 표본이 된 15세 이상의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크게 여덟 가지 요소를 측정한다. 거기엔 1인당 국민소득, 건강과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망, 정부와 기업의 부패를 묻는 문항이 포함돼 있다. 이는 사회와 개인의 행복이 연동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긍정심리학에는 사회가 끼어들 틈이 없다.
사라 아메드의 〈행복의 약속〉(후마니타스, 2021)은 제목에서 풍기는 것과 달리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열망을 깬다. 지은이에 따르면, 행복(happiness)이라는 영어 단어의 초기 의미 중 하나는 행운 관념, 즉 운(fortune)이나 요행(luck) 관념과 관련돼 있다. 이런 사실은 옛날 사람들에게는 행복이 장기적이거나 불변의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일례로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유명한 잠언에는 행복이 우연적인 행운을 지시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이 내포되어 있다. “행운의 여신은 그녀가 준 것만 앗아갈 수 있다. 하지만 덕은 그녀가 준 게 아니어서 앗아갈 수 없다.” 아울러 이 잠언에는 어떻게 하면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행운을 내 곁에 오래오래 붙잡아둘 수 있을까에 관한 철학자의 해답이 제시되어 있다. 부귀·명예·건강처럼 외부에서 오는 것은 일시적 행운이고, 인내나 용기와 같은 내면의 덕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기에 변치 않는 행복을 약속한다. 여기서 행복은 ‘좋은 삶’의 동의어다.
행복의 영토에 편입된 불행
세네카와 같은 철학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변덕스러운 행운보다는 일생 동안 함께할 수 있는 행복을 원했다. 시대나 국가 또는 문화권마다 추구하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다지만,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옛이야기의 화자와 근대의 동화작가들은 변함없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민담과 동화는 주인공의 삶을 이렇게 정리하며 끝을 맺는다.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오래오래 잘 살았더란다.” 이 평범한 결말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보편적 행복이 압축되어 있다. 먼저 이성(異性)을 만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것. 결말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가족이 오순도순 사는 곳은 그들이 태어난 고향(조국)임이 분명할 것이다.
옛이야기에 반복되는 행복 대본은 인간의 소박한 염원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지만, 행복이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통해 사회를 하나로 묶는 이데올로기 구실도 한다. “(보편적인) 행복은 말하자면 덮개를 제공한다. 세계를 조화로운 것으로 보는 관점, 세계관에 맞지 않는 것, 반대하는 것은 덮어버리는 방법인 것이다.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법 혹은 보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특정한 허위의식을 계승한다.”
많은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국가의 헌법이나 복지정책은 민담이나 동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행복 대본을 되풀이하거나 제도화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행복 담론은 보편적인 행복의 대열에서 벗어난 사람을 불행에 빠진 사람으로 타자화할 뿐 아니라, 윤리적으로 비난한다. 주류 행복 담론은 페미니스트, 퀴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주노동자), 가족과 자식을 낳지 않는 사람들, 장애인을 불행을 짊어진 사람들로 취급할 뿐 아니라 ‘좋은 삶’에서 벗어난 것으로 손가락질한다. 그러면서 “내가 바라는 건 단지 네 행복이야”라고 말한다. 이럴 때 쓰이는 ‘단지’는 억압이자 흉기이며, ‘행복’ 또한 그렇다.
행복 산업에 찬물을 끼얹는 〈행복의 약속〉은 기존의 행복 담론을 파괴하는 동시에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행복의 영토를 협소하게 만든다. 나아가 이 책은 불행을 행복의 영토 안으로 편입한다. “불행할 자유가 없다면, 행복할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불행은 자유가 될 수 있다.” 행복 담론에 혁명적 정치학이 필요한 이유다.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아라의정원, 2026)는 제주도에서 미술치료사와 생태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은혜의 행복론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해 단 한 번의 통과의례를 거치지만, 현대인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불확정의 공간(liminal space)에서 혼돈과 불안을 느낀다. 서울이라는 활동 무대를 애써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에 무작정 정착한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도 이 문턱 공간에서 헤매고 있다면 주변에서 들리는 ‘이렇게 살아야 해’ ‘이만큼은 가져야 해’ ‘이 정도는 이뤄야 해’와 같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걸 멈추고, 거미가 거미줄의 진동을 느끼듯 마음속 떨림이 살살 이끄는 곳을 따라 나아가보자.”
이 책은 사라 아메드의 핵심 주장과 공명한다. “돛과 닻, 안정과 자유는 본질적으로 정반대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안정적인 것은 답답함과 한 세트이고, 자유로운 것은 불안과 한 세트이다. 그렇기에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할 때 스스로에게 던지면 좋은 질문은 ‘안정적인 삶을 살래? 자유롭게 살래?’가 아니라 ‘답답해할래? 불안해할래?’이다. 이 둘 중에서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괴로움이 뭐냐고 묻는 것이다.” 지은이는 행복 담론이 배제한 불행과 우발성을 새롭게 보자고 권한다. “똑바른 길만이 길이라는 세상에서, 똑바른 길 하나만 빼고 삐뚠 길, 못난 길, 이상한 길, 엉뚱한 길, 애매한 길, 꼬불꼬불한 길, 오만 가지 길이 다 창조적인 길이니 말이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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