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거장의 인간 정체성 탐구…그렉 이건의 '잠과 영혼'

김기훈 2026. 3. 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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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한 남자가 있다.

휴고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필립 K. 딕상, 존 W. 캠벨상 등 세계 주요 SF 문학상을 석권한 이건은 테드 창과 함께 현대 SF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된다.

표제작인 '잠과 영혼'은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 SF다.

이번 소설집은 이처럼 SF적 상상력으로 촘촘히 이야기를 쌓아 올리며,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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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중단편소설 9편 수록
잠과 영혼 [허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한 남자가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혼수상태를 곧 '영혼의 부재'로 여기는 19세기 미국의 평행세계.

사고로 머리를 다쳐 혼수상태에 빠진 철도 노동자 제시는 생매장을 당한다.

기적적으로 관 속에서 눈을 뜬 그는 스스로 무덤을 파헤치고 나와 부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그를 맞이하는 것은 싸늘한 공포와 의심이다. 부모와 고향 사람들은 제시를 악마가 깃든 괴물로 취급한다.

'작가들의 작가', '최고의 하드 SF 작가'로 불리는 호주의 SF 거장 그렉 이건의 최신 중단편집 '잠과 영혼'(허블)이 번역 출간됐다.

휴고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필립 K. 딕상, 존 W. 캠벨상 등 세계 주요 SF 문학상을 석권한 이건은 테드 창과 함께 현대 SF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된다.

이번 책에는 작가 스스로가 "근래 집필한 중단편 중에서도 특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들"이라고 밝힌 아홉 편이 수록됐다.

그의 작품은 정교한 과학적 가설과 철학적 사유를 결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소설집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표제작인 '잠과 영혼'은 19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 SF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잠을 잘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사람이 의식을 잃으면 영혼이 몸을 떠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이런 믿음이 지배적인 공간에서 제시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 안간힘을 쓰고, 그 스스로도 의식 단절 전과 후의 '나'가 서로 같은 존재인지에 대해 고뇌한다.

이를 통해 종교적 확신이 사회 제도와 윤리를 어떻게 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 인간의 자각 능력만으로는 온전히 증명되지 않는 존재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생존을 입증하려는 몸부림을 통해 인간 존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또 다른 수록작인 '너 혼자서?' 역시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 작품은 뇌와 기계를 연결하는 뉴럴 링크를 강제로 심은 네 쌍둥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기억과 감각을 공유하는 실험체가 겪는 불안과 혼란, 모호해진 자아의 경계를 탐구한다.

'크리스털의 밤'은 한 억만장자가 광자 크리스털 속에 가상 우주를 창조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AI 인류를 기근과 학살로 내몰아 강제 진화시키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를 통해 설령 AI가 지성을 가졌다 해도, 존재의 생사를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용납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번 소설집은 이처럼 SF적 상상력으로 촘촘히 이야기를 쌓아 올리며,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장르적 쾌감보다는 철학적 성찰로 작품을 끌고 가며, SF만이 가능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김상훈 옮김. 540쪽.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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