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변호사-의뢰인 법률 자문 자료 압수는 “원칙적 위법” [허란의 판례 읽기]
수사기관 압수수색 관행에 제동
[법알못 판례 읽기]

변호사와 의뢰인이 주고받은 법률 자문 자료를 수사기관이 압수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명확한 법적 기준 없이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이 압수수색에 대해 대법원이 처음으로 헌법적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지난 2월 20일 검찰이 법무법인의 법률 자문 자료를 압수한 행위는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위법한 압수라고 판단했다(2024모730).
변호사-의뢰인 간 비밀유지권(Attorney-Client Privilege·ACP)을 헌법상 권리로 처음 인정한 이 결정은 올해 1월 국회를 통과한 변호사법 개정안과 함께 한국 법조계의 판도를 바꿀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문제가 된 압수수색
사건의 발단은 20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합투자기구(펀드)를 판매하는 A 운용사 대표이사 B 씨와 임직원들은 부실 펀드 판매와 관련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1·2심 법원은 전원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2025년 1월 상고를 기각해 무죄가 확정됐다. 문제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23년 7월 불거졌다.
수사기관은 선행 사건과는 별개의 혐의를 이유로 새 압수수색 검증영장을 발부받아 A 운용사 사무실에서 임직원들의 휴대전화와 전자정보, 회사 전자기기 등을 압수했다. 이후 선별 절차를 거쳐 약 12만 개의 이메일 등이 증거물로 압수됐다.
그런데 이 압수물 안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선행 사건의 1·2심에서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던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들과 의뢰인들이 사건 대응 과정에서 주고받은 의견서, 진술서, 피고인신문사항, 반대 신문 사항 등 법률 자문 관련 자료가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의뢰인들은 즉각 이의를 제기하며 준항고를 신청했다. 준항고란 검사나 수사기관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단될 때 당사자가 법원에 그 취소 또는 변경을 구하는 불복 절차다.
법원, 압수처분 취소 결정
서울남부지방법원은 압수된 전자정보 가운데 해당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가 수신인 또는 발신인인 메시지·전자메일과 변호사가 작성한 문서 자료에 대한 압수처분을 취소했다.
의뢰인이 법률 자문을 목적으로 변호인과 비밀리에 나눈 의사 교환에 대해서는 변호인이나 의뢰인이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논거였다.
원심은 해당 자료가 선행 사건에서 변호인과 주고받은 비밀스러운 의사 교환에 해당하고 의뢰인들이 압수에 이의를 제기한 데다 변호인들이 이 사건 영장상 범죄혐의의 공범이라는 점도 소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법무법인 관련 자료 중 선행사건과 무관한 자료가 섞여 있다고 해도 해당 자료 전체가 영장이 허용한 범위를 벗어난 것이므로 모두 취소돼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대법원은 검사의 재항고를 기각하며 원심의 결론을 수긍했다. 그러면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헌법적 토대를 확인했다.
헌법 제12조 제4항과 제5항은 형사절차에서 체포·구속된 사람이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고, 불구속 피의자·피고인의 경우에도 헌법상 법치국가원리와 적법절차 원칙에 따라 이 권리가 당연히 인정된다는 점을 전제했다.
대법원은 나아가 이 권리의 실질적 의미를 강조했다. 변호인의 조력을 충분히 받으려면 단순히 접견·조언·상담이 보장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도 비밀이 완전히 보장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비밀이 보장되지 않으면 피의자·피고인이 변호인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기를 꺼리게 되고 결국 변호인 조력권 자체의 존재 의의가 훼손된다는 논리다.
이를 바탕으로 대법원은 “피의자·피고인과 변호인 사이에 생성된 형사사건에 관한 법률 자문 서류 등에 대한 압수는 헌법상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허용돼서는 아니 된다”는 핵심 법리를 선언했다.
대법원이 이 결론에 이른 논리는 두 갈래다. 법률 자문 자료의 압수가 제한 없이 허용되면 의뢰인의 비밀 보장이 어려워지고 비밀보장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의뢰인이 변호인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기를 꺼려 실질적 조력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 첫째다.
법률 자문 서류에는 방어권 행사의 핵심 비밀이 포함될 가능성이 크므로 이를 무제한 압수하는 것 자체가 피의자·피고인의 방어권을 현저히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이 둘째다. 대법원은 형사소송법도 근거로 들었다.
제112조는 변호사가 업무상 위탁받아 소지하는 타인의 비밀 관련 물건에 대해 압수거부권을, 제149조는 그로 인해 알게 된 비밀에 대해 증언거부권을 각각 부여하고 있다.
다만 의뢰인이 압수를 승낙한 경우 변호인이 의뢰인과 공범 관계에 있거나 범죄에 관여한 경우 등 중대한 공익상 필요가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압수가 허용된다고 밝혔다. 이 예외는 범죄 혐의의 중대성, 압수물의 증거가치, 변호인 조력권의 침해 정도 등을 종합해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에서는 압수 자료가 새 사건 범죄사실 증명에 필수적인 증거라고 보기 어렵고 변호인의 공범 관여도 소명되지 않았다며 압수처분 취소를 확정했다.
이번 결정은 ACP를 헌법상 권리로 처음 인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올해 1월 통과된 변호사법 개정안(제26조의 2)의 예외 사유와 이번 결정의 기준이 사실상 일치해 개정법 시행 전에도 형사사건에서는 헌법에 근거해 ACP를 주장할 수 있음이 확인됐다.
다만 이번 결정은 형사절차에 한정돼 민사소송이나 행정조사에는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 형사 영역 밖에서의 ACP 보호 기준은 향후 판례 축적을 통해 다듬어질 것으로 보인다.
[돋보기]
기업들, 압수수색 현장에서 ACP 대상 즉시 식별해야
이번 결정은 법무법인 광장(정유철·김영민·김은수 변호사)이 2023년 압수수색 현장에서부터 준항고, 재항고에 이르기까지 ACP 위반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끌어냈다.
광장은 압수수색 현장에서 즉각 이의를 제기한데 이어 준항고 절차에서 헌법상 변호인 조력권 및 형사소송법·변호사법상 비밀유지의무, 무기 대등 원칙 훼손, 주요 법치국가의 ACP 보장 사례 등을 근거로 압수의 위법성을 주장했다.
광장 형사그룹을 이끄는 김후곤 대표변호사는 “ACP는 단순한 직업윤리가 아니라 헌법에서 천명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의 목적과 실천적 의의 및 그 구체적 구현을 위한 본질적인 내용”이라며 “입법적 근거가 불명확하던 시기에도 헌법에 기초해 ACP를 주장할 수 있음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ACP 제도 안착을 위한 법조계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협회장 김정욱)는 변호사법 개정안 통과 직후 ‘ACP 관련 가이드라인 연구 태스크포스(TF)’(위원장 이문한)를 꾸리고 2월 23일 첫 회의를 열었다.
TF는 의사 교환의 보호 범위, ACP 적용 업무 범위 정립, 오남용 방지를 위한 직업윤리 기준 강화 등을 검토한다. 기업 입장에서도 실무적 변화가 요구된다.
법률 자문 자료에 헌법적 보호 근거가 생긴 만큼 관련 자료를 별도 분류·관리하고 압수수색 현장에서 ACP 대상 여부를 즉시 식별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프로토콜을 사전에 마련해야 한다. 법률 자문 자료가 이미 압수됐다면 준항고를 적극 검토해야 하며 전자정보가 포함된 경우 디지털 포렌식 전 과정에 전문가 관여가 필수적이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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