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도 살인 공범…'36주 임신중지' 재판이 남긴 숙제[법정B컷]
'알았을 것'과 '몰랐을 것'…살인 고의 두고 엇갈린 해석
여성계 "판단 환경 고려해야"…모성 전제한 시선 비판도
입법 공백·위기 임산부 현실…판결이 드러낸 미룰 수 없는 과제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 법정 앞은 선고 시작 전부터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여성단체 활동가와 일반 시민, 취재진까지 몰리면서 재판정 좌석은 물론 바닥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날은 이른바 '36주 임신중지 사건' 1심 선고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2024년 6월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임신 36주에 가까운 태아를 제왕절개로 꺼낸 뒤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입니다. 재판부는 수술을 집도한 의료진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산모 권모씨에게는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했습니다. 다만 권씨에게 선고된 형량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었습니다.
사법기관의 판결은 단순히 한 사건의 결론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번 재판 역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태아의 죽음을 어디까지 형사 책임으로 볼 것인지, 그리고 그 책임을 산모에게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는지, 이 재판은 그 기준을 묻는 자리였습니다. 재판부는 왜 이런 판단을 내렸을까요. 또 이번 판결은 우리 사회에 어떤 질문을 남겼을까요. 법정B컷에서 짚어봤습니다.
의료진과 산모 모두 '살인 공범'…재판부 판단 왜
| ▶1982.10.12. 분만 중인 태아를 질식사에 이르게 한 사건 대법원 판결(81도2621) |
| "태아가 어느 시기에 사람이 되는가에 관하여는(…)형법상의 해석으로는 규칙적인 진통을 동반하면서 태아가 태반으로부터 이탈되기 시작한 때 다시 말하여 분만이 개시된 때(소위 진통설 또는 분만개시설)가 사람의 시기라고 봄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며(…)…" |
재판부는 제왕절개를 통한 임신중절 수술을 진행한 병원장, 집도의뿐만 아니라 '산모'인 권씨 역시 살인의 공범이라고 봤습니다. 특히 산모에게는 살해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미필적 고의란 결과 발생 가능성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용인한 채 행위를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 ▶2026.3.4. 서울중앙지법 '36주 임신중지 사건' 1심 판결문 |
| "피고인 권씨가 ①자신이 임신하고 있던 태아가 모체 밖으로 배출되는 경우 생존할 수 있고, ② 이 사건 수술 과정에서 태아가 출생할 수 있으며, ③ 그 경우 이 사건 의원의 의료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살아 있는 피해자를 사망하게 할 것임을 인식하거나 예견했음에도, ④ 이 사건 수술을 받음으로써 그러한 위험을 용인하였다면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결국 재판부는 권씨가 태아가 살아 태어날 수 있다는 점을 알았고, 그럼에도 수술을 선택했다면, 의료진이 어떤 방식으로든 태아를 죽음에 이르게 할 가능성 역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논리를 든 겁니다.
"모체 안에서 사산될 줄 알았다"…권씨 측의 논리
| ▶'36주 임신중지 사건' 피고인 측 국선변호인 최종 의견서 |
| "피고인은 태아가 태중에서 사망한 후 사산된 태아를 배출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인식을 형성할 만한 합리적인 사정이 충분히 존재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영아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알았다면 이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피고인의 진술 역시 다른 산모들의 진술 및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에 비추어 보더라도 쉽게 배척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재판부는 권씨가 의료진에게 구체적인 수술 방식 등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피고인 권씨는 지인을 통해 브로커 역할을 한 배모씨에게 '태아가 사산되느냐'는 취지로 물어봤을 뿐, 정모씨(산부인과 상담실장)나 윤씨(병원장) 등 이 사건 의원 의료진에게 구체적인 수술 방법과 태아가 살아서 태어나는지 등에 관해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선 재판부가 '왜 묻지 않았느냐', '왜 더 확인하지 않았느냐'는 점을 고의 판단의 근거로 삼은 방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후기 임신중지와 관련한 공식적인 의료 가이드라인이나 상담 시스템, 공적 정보 체계가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산모 개인에게만 충분한 인식과 판단을 기대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다혜 연구위원은 "후기 임신중지 사건의 상당수는 산모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사건에서 산모가 정말 정상적인 판단 환경에 있었는지, 충분히 사고하고 확인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까지 함께 살펴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권씨 측 변호인 역시 같은 지점을 문제로 짚습니다. 김명선 변호사는 "태아가 사산돼 나오는지(A), 살아서 태어나는지(B)는 양자택일의 문제인데 A라고 안내를 받은 사람이 B의 가능성까지 용인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추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임신중지를 고민하는 산모는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돼 있고 죄책감도 느끼는 상태일 수 있다"며 "저라도 그 상황이라면 아이가 어떻게 죽음을 맞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2026.3.4. 서울중앙지법 '36주 임신중지 사건' 1심 선고 中 |
| "피고인은 이 사건 수술로 인해 자신의 신체에 수술흔적이 남을까 걱정했을 뿐 피해자가 어떻게 살해되고 사체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유튜브 구독자를 늘려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이 사건 범행에 관한 동영상을 게시했고 우리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
| ▶'36주 임신중지 사건' 피고인 측 국선변호인 최종 의견서 |
| 피고인은 이 사건 낙태 과정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피고인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면 범행을 은폐하기 급급했을 것이지 이를 영상으로 공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려운 행동입니다. |
'징역형 집행유예'…재판부가 참작한 사정들

그렇다고 재판부가 권씨를 단순히 비정한 산모로만 본 것은 아닙니다.
판결 후반부로 갈수록 재판부는 이 사건이 개인의 냉혹함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비교적 길게 적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권씨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재판부는 먼저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이어진 입법 공백을 짚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2019년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에도 국회가 후속 입법을 하지 않으면서 임신중지 관련 규범 공백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위기 임산부에 대한 상담과 지원, 보호출산 제도 역시 미비해 실제로 권씨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습니다.
재판부는 권씨 개인의 상황도 상세히 들여다봤습니다.
권씨는 사건 당시 별다른 소득이나 재산이 없었고 가족과도 오랜 기간 연락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자신보다 20세 이상 많은 남성과 교제하는 것 외에 뚜렷한 사회적 유대관계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또 임신 사실 역시 초기에 알지 못했고 몸의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뒤늦게 임신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에 비춰 권씨가 임신 사실을 조기에 인지하고 국가 지원체계를 알아보거나 주변의 도움을 구할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고 판단했습니다.
| ▶2026.3.4. 서울중앙지법 '36주 임신중지 사건' 1심 판결문 |
| 여성에게 있어서 자녀의 양육은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신체적·정신적·정서적 노력을 요구하고 여성이 처한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상황에 따라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과 직장 등 사회생활에서의 어려움, 학업 계속의 곤란 등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부담과 어려움은 성차별적인 관습, 가부장적 문화, 열악한 보유어건 등 사회적 문제가 가세할 경우 더욱 가중된다. |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습니다. "범행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 사건에 한해서는 무작정 비난하기 어렵다."
"이번 사건에 한해"…재판이 남긴 숙제
재판부는 태아가 모체 밖으로 나온 순간 형법상 '사람'이 된다는 기준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동시에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려운 질문을 남겼습니다.
고주수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기준과 의료 지침, 공적 상담 체계가 여전히 부재한 상황에서 유사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형사재판은 유무죄와 형량을 선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제도가 부재했고, 누가 어떤 정보에서 배제됐으며, 왜 한 여성이 36주가 되도록 임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는지까지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번 판결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판단을 넘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생긴 입법·제도적 공백을 우리는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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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주보배 기자 treasur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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