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기회’는 안희정이 아닌 ‘김지은 동지’에게 [.txt]
안 전 지사 정치 복귀 움직임과 두둔 목소리
법정투쟁 뒤에도 피해자의 싸움은 이어져
김지은 도운 문상철의 헌신·용기도 소중

어떤 책들은 한편의 글을 넘어 그 자체로 투쟁이자 상징이 된다. 2020년에 출간된 ‘김지은입니다’도 그렇다. 지난 2월13일, 한 무리의 여성들은 ‘김지은입니다’를 들고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약 일주일 전, 김지은씨를 수차례 성폭행한 죄로 대법원에서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정계 은퇴 8년 만에 박정현 부여군수의 출판기념식에 모습을 드러내며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
기념식 주최 쪽은 현장에서 안 전 지사를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분”이라고 소개했고, 박 군수는 “사실상 제가 정치하게 만든 사람”이라고 그를 추켜세우며 “잘못하면 또 비난받을 수 있을 텐데 출판기념회에 온 거 보니까 너무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중에 페이스북에 안 전 지사와 악수하며 환히 웃는 사진을 올렸다. 현장에 참석한 민주당 박범계 국회의원은 그를 ‘동지’라 부르며 환영했다.
여성단체와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비판이 일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더불어민주당은 권력형 성폭력과 단호하게 결별하고, 안희정의 정치 복귀 시도를 즉각 차단하라”고 성명을 냈다. 녹색당과 정의당은 각각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그 무엇도 하지 않은 그가 무슨 자격으로 정치의 장에 다시 얼굴을 내미는가”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온 성평등과 인권의 기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박지현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우리 안희정 동지’라는 말 속에 피해자의 고통이 설 자리는 없다”며 “민주당이 이제는 제발 권력형 성범죄와 결별했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러자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단체들의 비판이 지나치다며 안 전 지사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특히 하태경 보험연수원장은 여성단체들의 비판이 “지극히 일상적인 시민권마저도 안희정에겐 영구히 박탈되어야 한다는 인식”이라며, 안 전 지사가 형을 살았으므로 “시민 안희정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전형적인 오버액션이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안 전 지사의 일상적인 시민권을 여성단체가 무슨 수로 박탈하나. 안 전 지사는 행사에 자유롭게 참석했고, 여성단체에는 이를 막을 권한이 없었다. 여성단체가 한 것은 하 원장이 여성단체들의 비판을 부적절하다고 비판하듯, 안 전 지사와 주변인들의 행태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한 것뿐이다. 부적절한 행위를 비판받지 않을 권리를 우리가 언제부터 ‘일상적인 시민권’이라고 불렀나.
무엇보다 안 전 지사는 복역 뒤 만기 출소를 했을지언정 김지은씨의 회복을 위해 단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김지은씨와 연대한 이들은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당을 떠나야 했지만 안 전 지사와 연대한 이들은 당직과 공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오히려 안 전 지사 쪽은 형사재판이 끝나고 시작된 민사재판 내내 실형을 선고받은 범죄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신체 재감정을 재차 요구하는 등 피해자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오죽하면 민사 2심 재판부가 “사람은 건물이 아닙니다”라며 신체 재감정 요구를 철회할 것을 종용할 정도였다. 이런 잔인한 괴롭힘과 보복의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난데없이 시민권의 이름으로 면제할 권한이 대체 누구에게 있나.
김지은씨는 하 원장에게 “시민권은 김지은에게도 있다. 피해자에게는 생존권의 문제”라며 “안희정 측의 가해 행위를 한번 찾아보거나, 최소한 ‘김지은입니다’를 읽었으면 한다”고 했다. 안희정의 법정 구속 이후에도 일부 언론이 여전히 안희정의 출마를 말했던 부분을 짚은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도 ‘김지은입니다’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완결을 바랐다. 기록을 모두 마치면 책이 끝나듯 힘겨운 싸움도 끝이 나길 소망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미결이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이 문장의 마침표가 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의 초판 인쇄일은 2020년 2월25일이다. 김지은의 바람대로 이날부터 그에게 새로운 삶, ‘두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2018년 3월5일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에서 시작된 안희정 ‘미투’의 법정 투쟁은 이 책이 나온 뒤로 무려 5년이 더 지난 2025년 3월12일에야 끝났다. 항소심 법원은 안 전 지사와 충청남도에 공동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8304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안희정 개인의 범죄 책임에 더해 충청남도라는 조직의 구조적 책임을 법적으로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어난 일들은 법정 투쟁 이후에도 김지은씨의 외로운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용할 문장은 또 있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정치를 도구로 선택한 당신께 이 책을 바칩니다.” 김지은씨가 자신의 책에 ‘범죄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처음으로 내게 “도와줄게” “함께해줄게”라고 했던 사람’이라고 묘사한 문상철 작가가, 2023년 11월에 펴낸 ‘몰락의 시간’ 첫 페이지의 헌사다.
안 전 지사의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수행 팀장으로까지 활약했던 문 작가는 김지은씨를 도왔다는 이유로 촉망받는 보좌진에서 순식간에 함께 일하기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찍혀 정치권에서 밀려났다. “그게 말이야, 안 지사 쪽 의원들이 문 보좌관 데리고 있지 말라고 우리 후보 쪽에 말들을 하고 갔다고 하네. 자네를 극렬하게 싫어한다나… 미안하게 됐다.”
정치에서 밀려난 뒤, 그는 차분히 안희정의 몰락을 복기했다. “가해자 한명의 잘못으로만 여겨서는 막을 수 없다. 왜 우상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정치의 몰락이 시작됐는지, 그리고 왜 이 사건을 접하고도 피해자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는지에 대해 함께 논의해야 한다.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2, 제3의 안희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최근까지 정치권에서 반복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을 보면 그의 걱정은 결코 기우가 아니다.
윤석열 내란죄 1심 선고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3·8 세계 여성의 날, 정치가 권력자를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진정한 시민의 도구로 기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지은입니다’와 ‘몰락의 시간’을 다시 읽는다. 일년 전, 응원봉 광장에서 우리가 함께 꿈꾼 ‘다시 만난 세계’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정치에 헌신했고, 닥쳐온 폭력에 용기 내어 맞서 싸운 김지은 같은 이들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어디든 갈 수 있고 ‘동지’라며 환영받을 수 있는 그런 세계다. 그 세계는 지금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는가. 김지은 동지와 문상철 동지의 ‘두번째 기회’를 민주당은, 우리 사회는 언제쯤 말할 수 있을까.
장혜영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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