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닥불 피워 놓고, 기타를 울려라

임희윤 문화평론가(전 동아일보 기자) 2026. 3. 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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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오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통기타를 퉁기며 함께 노래하던 곡.

어차피 재가 돼 사라질 것이며 행여 바람이라도 불면 꺼지는 건 한순간인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라 노래하는 것은 거대한 아이러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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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피워 놓고/마주 앉아서/우리들의 이야기는/끝이 없어라~'('모닥불' 중)

삼삼오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통기타를 퉁기며 함께 노래하던 곡. 젊음처럼 타오르는 화톳불 열기에 두 볼은 붉게 달아오르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두런두런 이야기와 노랫소리에 청춘이 익어가던 계절이 있었지요.

최근 1970년대를 풍미한 싱어송라이터 박인희의 노래를 오랜만에 '정주행' 했습니다. 아마 얼마 전 약속 때문에 신촌에 갔다가 개강 시즌이란 말을 들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햇볕이 따사로워지고 자연의 초록이 풍성해지면 새 친구, 옛 친구 함께 어깨를 걸고 강촌이며, 가평이며 하는 곳에 MT를 가던 게 생각납니다. 제법 밝아진 햇살을 마주하니 박인희의 또 다른 노래까지 떠올랐습니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봄이 오는 길' 중)

깡충깡충 뛰듯 경쾌한 셔플 리듬에 실려 흐르는 시냇물 같은 목소리. 1970년대식 낭만을 기억하는 이에게 박인희는 단순한 가수를 넘어 '문화 아이콘'이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하는 박인환의 명시 '목마와 숙녀'는 많은 이에게 활자가 아닌 음성으로 기억되죠. 라디오로, 음반으로 당대를 수놓은 박인희의 새벽별 같은 낭송 때문입니다.

그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역시 자신의 낭송으로 이름난 '얼굴'도 박인희가 대학 재학 중 직접 지은 시였죠. 가수 활동을 접어둔 뒤에도 산문집과 시집을 여럿 내며 작가로서 창작을 이어갔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와 시는 무척 가깝습니다. 노랫말도 실은 일종의 시입니다. 만약 제가 누군가에게 뜬금없이 '나의 눈물 모아 바다로만 흘려보내 나를 다 감추면 기억할게 내가 뭍에 나와있어 그때 난 숲이려나?'라고 카톡을 보낸다면? '갑자기 무슨 뚱딴진데?'라는 답이 돌아올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 글에 멜로디를 붙이고 악기 소리를 흘려 넣어 노래란 도자기로 빚어낸다면? 최유리의 '숲'이 됩니다. 노래도, 시도 그 재료는 언어이지만 언어 체계를 뛰어넘는 4차원의 미학을 만들어 냅니다. 노래란 어쩌면 시를 읊는 아름다운 방법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최근 박인희의 '모닥불'을 유심히 듣다가 저는 그 노랫말에 새삼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모닥불 피워 놓고/마주 앉아서…'의 감성만 떠올렸지, 그 뒤의 이야기는 전엔 신경 안 썼나 봅니다. 이어지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낭만보다 차라리 죽음에 대한 곡이었습니다. '뼈'를 때리는 여운은 '…끝이 없어라'에서 나옵니다. 어차피 재가 돼 사라질 것이며 행여 바람이라도 불면 꺼지는 건 한순간인데,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라 노래하는 것은 거대한 아이러니니까요. 여기서 '끝이 없다'의 단언은 어쨌든 끝날 때까지는 끝없이 이야기하며 버틸 거라는 다짐일까요, 아니면 곧 끝날지도 모르고 영원할 듯 떠들어대는 우매한 인간들에 대한 풍자일까요? '아는 맛'이라 믿었던 노래에서 새로이 발견한 이 심연을, 저는 당분간 즐거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돌아보면 제게도 방랑자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도 직업도 없는, 그야말로 인생의 집시였지만 가슴 가득 뜨거운 불이 타던 계절 말입니다. 과거는 미화되기 때문일까요. 그래도 그런 빛바랜 정경 하나 가슴에 걸어두고 사는 게 어딥니까. 인스타그램 사진 속 대단한 미술관 소장품보다, 이 그림 한 점이 제겐 더 값진 걸요.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방랑자' 중)

임희윤 문화평론가(전 동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