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요절 기형도… 한국 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이한수 기자 2026. 3. 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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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89년 3월 7일 29세
윤동주 시비에 기댄 기형도 /광명문화재단 기형도문학관 제공

1989년 3월 7일 새벽 스물아홉 살 시인 기형도(1960~1989)는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중앙일보 5년 차 기자,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4년 된 신진 시인이었다. 첫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두 달 후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나왔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시집 제목을 붙이고 해설을 썼다.

살아 있을 때 시집을 내지 못했으나 시인을 찾는 독자는 계속 이어졌다. 10주기인 1999년 미발표 시 37편과 단편소설·산문 등을 더해 ‘기형도 전집’이 출간됐다.

1999년 2월 24일자 21면.

“90년대 한국 문학의 ‘젊은 상징’으로 살아 있는 시인 기형도 10주기를 맞아 ‘기형도 전집’(문학과 지성사)이 내주 초 나온다. (중략) 그는 80년대 끝에 서른의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죽어서 90년대의 시인으로 살고 있다. 89년 5월 출간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18만부 찍으면서 시인 지망생들 사이에 문학적 신화로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안개, 밤 눈, 진눈깨비, 가는 비, 저녁 거리의 가등(街燈) 등등 기형도 시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이미지들이 젊은 날의 그리움과 우울한 영혼의 초상을 그려낸 탓이다.”(1999년 2월 24일 자 21면)

2008년 1월 17일자 A30면.

기형도는 ‘90년대의 시인’으로 그치지 않고 2000년대 시인을 넘어 한국 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자리했다. 2008년 조선일보 ‘현대시 100년’ 기획에서 시인 100명이 추천한 100편 중 시 ‘빈집’을 선정했다.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에는 ‘질투는 나의 힘’이 뽑혔다.

2008년 10월 17일자 A28면.

시집 ‘입속의 검은 잎’은 매년 1만~1만5000부 이상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지금까지 40만부 팔렸다. 시 ‘질투는 나의 힘’ ‘빈 집’ ‘엄마 걱정’ ‘위험한 가계·1969’ 등은 영화·노래·연극 등으로 변주됐다. 2017년엔 고향 경기도 광명에 ‘기형도 문학관’이 세워졌다.

“기형도 시인(1960~1989)은 경기도 연평도에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때부터 시흥군(현재 광명시 소하동)에서 자라고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채 뇌졸중으로 요절할 때까지 살았다. 그의 시 ‘엄마 걱정’은 소하동에 살던 유년 시절을 회상한 작품이다. 어머니가 야채 행상에 나섰던 유년기의 가난에 담긴 슬픔을 맑은 감성의 언어로 노래해 애틋한 감동을 자아냈기에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기형도는 시흥군이 1981년 광명시로 승격하기 전 1970년대 산업화를 대표한 공장 굴뚝과 주변 풍경을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라며 음울하게 묘사한 시 ‘안개’로 등단했다. (중략) 광명시는 2014년부터 기형도 문학관을 추진했고, 기형도 시인이 다닌 연세대 문학회 출신의 평론가 이영준, 소설가 성석제씨 등을 비롯해 평소 가까웠던 문인들과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쳤다. 지상 3층 건물로 문을 연 기형도 문학관은 1층 전시 공간 이외엔 시집 전문 도서관과 북카페, 문학도를 위한 습작실 등 광명 시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꾸몄다.”(2007년 11월 11일 자 A19면)

2017년 11월 11일자 A19면.

기형도는 음울한 시편을 남긴 까닭에 젊어서 죽음을 예감한 시인처럼 각인돼 있다. 기형도의 동료였던 박해현 문학전문기자는 김영승 시인의 글을 빌려 ‘기형도 시인 다시 읽기’를 권했다.

2008년 10월 27일자 A24면.

“‘내가 만난 시인 기형도는 유령이 아니라 ‘라면 먹을까요? 라면? 라면 말고 떡라면 먹지요. 떡라면 어때요? 아 경악! 경악? 갈비탕 드시겠어요?…’ 하고 재잘대길 잘하던 아주 경쾌하고 발랄한 보편 타당성 있는 청년이었다’는 겁니다. “나는 진실로 처음 기형도를 만났을 때나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의 시편 그 어느 구석을 정독해 보아도 ‘죽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 김영승은 “그것은 삶의 냄새였고 그 죽음의 이미지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했던 삶의 한 건강한 장치였을 뿐이다. 그의 시는, 아니 시적 공간은 다 연극의 소도구, 조명 같은 장치이며 효과였을 뿐”이라고 역설했습니다.”(2008년 10월 27일 A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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