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그곳의 추억…코 끝에 머물다

2026. 3. 7.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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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향수 로드를 걷다
디지털 과잉의 시대, ‘인간성의 마지막 감각’으로 후각이 다시 주목 받으면서 향기 산업이 급팽창하고 있다. 기술이 일상을 압도할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복제되지 않는 감각, 기계가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감각을 찾기 시작했고 그 최전선에 있는 감각이 바로 후각이기 때문이다. 냄새는 저장하기 어렵고 디지털로 완전히 전송할 수 없으며 개인의 기억과 몸, 감정과 직접 연결된다.

요즘 삼청동과 북촌, 서촌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한 집 건너 하나씩 향수 매장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즈넉한 한옥과 세련된 향수. 얼핏 낯설어 보이는 조합이지만 삼청동은 어느새 ‘K-향수 로드’로 불리며 국제적 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한국 여행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한 기념품으로 향수가 새로운 필수품이 되고 있다. 이제 ‘향기’는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용과 봉황, 신선과 동물, 악기를 연주하는 다섯 연주자 등 독창적인 조형으로 백제인의 세계관과 사상을 보여주는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후각은 시각이나 청각과 달리 대뇌 변연계, 즉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과 직접 연결된 감각이다. 특정 향을 맡는 순간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이유 없이 마음이 안정되는 경험은 이 때문이다. 최근 신경과학 연구에서는 라벤더·베르가못·샌달우드 계열의 향이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심박 변이를 안정화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잇따라 보고되고 있다. 서구의 명상 앱, 요가 스튜디오, 심리치료 공간에서는 조명과 음악만큼이나 ‘향 환경 설계’가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한국 사회에서도 향수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지친 일상에 위로와 활력을 더하는 생활 감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명상 문화의 확산, 마사지 산업과 아로마테라피 시장의 성장, 신경과학 연구 성과가 맞물리며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시장 확대로 이어져, 시장조사회사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향수 시장 판매액은 2019년 5317억원에서 2022년 8564억원으로 61% 급성장했고 2024년엔 1조원대(1조585억원)로 올라섰다. 2033년까지 연평균 5%씩 성장할 것이란 전망치도 나온다.

삼청동 중심으로 국내 향수 브랜드 확장
국내 향수 브랜드 ‘그랑핸드’가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마을인 북촌 가회동에 마련한 매장. [사진 그랑핸드]
MZ세대가 향수에 열광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핵심은 ‘좋은 향’이 아니라 ‘나만의 향’이다. ‘틈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니치(niche)에서 비롯된 니치 향수는 전문 조향사가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든 프리미엄 제품이다. 대중을 겨냥한 패션 향수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니치 향수는 대량 생산용 합성 원료 대신 천연 향료를 사용하고, 무엇보다 독특한 콘셉트와 이야기를 중시한다.

특히 향수가 불러오는 지리적 상상력은 제품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다. 대중 브랜드 향수조차 지명을 활용하거나 특정 도시와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다. 조 말론이 영국의 향기를, 샤넬 No.5가 프랑스 파리를 대표하는 문화 상품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니치 향수는 향의 원료 산지와 향이 불러오는 풍경, 이야기를 통해 지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행지의 풍경이 담긴 엽서와 함께 진열된 향수는 조향사가 영감을 얻은 장소를 설명하는 장치다.

향수 브랜드들의 한옥 매장을 찾는 외국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사진 김이재]
예를 들어 ‘부르즈 로열’이라는 이름의 향수라면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의 야경에서 포착한 도시의 영광과 가능성이 떠오른다. ‘메리의 정원’은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퀸 메리스 가든을 거닐던 아침의 햇살을 불러낸다. ‘런던 버로우’는 다양한 음식과 색감으로 가득한 시장의 활기와 햇빛을 향으로 풀어냈다. 이제 향수 매장은 지리적 상상력을 동원해 세계를 여행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냄새는 장소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다. 문화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저서 『장소애(Topophilia)』에서 인간이 장소에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냄새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했다. 샤넬 No.5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창립자의 공간적 경험과 지리적 상상력이 응축된 기억의 결정체였다. 20세기 초 프랑스 향수는 장미·제비꽃·자스민 같은 단일 꽃 향에 의존했다. 그러나 샤넬은 남프랑스 그라스를 찾아가 최고의 조향사와 협업하며 전혀 다른 향을 개발했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연인과의 기억을 향으로 남기는 과정은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알데하이드를 대담하게 사용해 ‘어디서 왔는지 특정할 수 없는’ 복합적 향을 완성했고, 이 향은 마릴린 먼로의 일화와 함께 전설이 됐다. 샤넬 No.5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30초마다 한 병씩 팔리는 향수로 남아 있다.

향수 브랜드들의 한옥 매장을 찾는 외국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사진 김이재]
향수는 더 이상 몸에 두르는 장식품에 머물지 않는다. 일상의 틈새를 여행의 설렘으로 채우고, 잊고 있던 장소의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열쇠가 된다. 향은 공간이 되고, 그 기억은 다시 일상이 된다. 그러나 향기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알고리즘이 추천하기도 쉽지 않다. MBTI 유형별 향수 추천이 등장했지만, 향은 데이터로 완전히 환원되기 어렵다. AI 기술로 개인 맞춤형 향수를 만드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국 선택의 순간에는 직접 시향한 감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향수 매장의 분위기, 그리고 향수 가게가 자리한 동네의 맥락이 더욱 중요해진다. 임대료가 비싼 삼청동에 국내외 향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몰리는 이유다.
부산 바다, 전주 한옥, 제주 바람도 향으로
글로벌 향수 브랜드 르 라보가 서울을 주제로 출시한 향수 ‘시트롱 28’. [사진 르 라보]
최근 삼청동 한옥에는 최고급 니치 향수 브랜드 ‘르 라보’를 비롯해 ‘그랑핸드’ ‘노운언노운’ ‘빌라 에르바티움’ ‘탬버린즈’ 등 국내 향수 브랜드들이 잇따라 둥지를 틀고 있다. 한복을 입고 삼청동 한옥 향수 매장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향을 고르는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도 이제 낯설지 않다. 일본·대만·중국뿐 아니라 최근에는 중동과 유럽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니치 향수 구매가 한국 여행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우리가 여행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눈앞의 풍경만이 아니다. 그 장소에 머물던 공기의 결, 바람의 온도, 햇살이 남긴 냄새 같은 ‘감각의 잔상’이다. 향은 단순한 후각 자극을 넘어 장소와 시간을 하나의 기억으로 묶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다. 뉴욕에서 출발한 글로벌 향수 브랜드 ‘르 라보’는 세계 주요 도시에 어울리는 향을 개발해 왔으며, 삼청동 한옥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서울’ 향수를 선보였다.

한국의 도시와 여행의 기억을 향기로 풀어내는 향수 브랜드 르 플랑에떼가 제작한 전국 향기 지도. [사진 르플랑 에떼]
‘한여름의 절정’이라는 뜻을 가진 국내 향수 브랜드 ‘르 플랑에떼’는 국내 여행에서 마주한 도시와 자연의 찰나를 향으로 불러내며 부산·남해·경주·전주 등 지명을 활용한 향을 선보였다. 사진을 전공한 조향사는 풍경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기의 냄새와 감정을 향으로 치환하고자 했다. 그는 사진보다 냄새와 감정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한국의 향기를 지도에 펼쳐 보였다. 겨울 끝자락 가장 먼저 봄이 찾아오는 남해를 표현한 향은 유자의 싱그러움과 따뜻한 바다의 온도를 전한다. 부산은 여름 해질녘 맨발로 걷던 해변의 기억을 담아 해방감과 짭조름한 바다 공기, 노을빛의 로맨스를 섞었다. 전주는 한옥의 서까래와 흙내음, 고요한 공기를 우디 노트로 풀어내 사색적 감정을 자아내고, 제주는 바람과 바다, 숲의 리듬이 공존하는 향으로 완성됐다. ‘한국의 장소성을 향으로 소유하는 경험’은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되며 글로벌 팬덤으로 확장되고 있다. BTS의 진과 제이홉이 각각 남해와 전주의 향을 선택해 팬들에게 선물하면서 폭발적인 관심이 이어졌고, 매장 앞에는 각국의 팬들이 줄을 서서 시향하며 아티스트의 고향이나 추억이 깃든 도시의 향을 구매해 갔다. 향수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한국의 로컬 도시를 세계에 알리는 ‘문화 외교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브랜드는 2026년 밀라노 동계올림픽 한국관 전시 브랜드로도 선정됐다.
한국의 도시와 여행의 기억을 향기로 풀어내는 향수 브랜드 르 플랑에떼가 제작한 남해를 주제로 한 향수. [사진 르플랑 에떼]
향의 언어는 산업을 넘어 예술과 박물관으로 확장되고 있다. 향은 본래 종교 의례와 깊이 연결된 감각이다. 침향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수입품이자 사치품이었고 불교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단 한 점의 유물, 백제금동향로를 중심으로 전시 공간을 구성하며 새로운 문화 명소로 떠올랐다. 백제금동향로는 향을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세계 질서를 연결하는 매개로 형상화한 상징물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맡았던 구정아 작가는 ‘한국의 향’에 대한 기억을 17가지 향으로 구성해 국제적 호평을 받았다.

디지털과 데이터가 독주하는 시대, 향기의 귀환은 인간이 몸과 기억, 장소성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신에게 바치던 향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향으로 이동했고, 공적 공간에서 배제되었던 후각은 다시 도시와 예술, 산업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김이재 지리학자.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이자 그레이트지오그래픽협회(GGS) 이사장이다. 런던대와 싱가포르국립대에서 연구했다. 세계 100여 개국을 답사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유럽·아시아·아프리카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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