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부영의 브랜드 & 트렌드 <64>] 색(色)이 곧 브랜드다…티파니 블루와 에르메스 오렌지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2026. 3. 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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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의 오렌지색(위쪽)과 삼성의 파란색은 브랜드 자산이자, 치열한 전략의 산물이다. /엑스

카페에서 초록색 자극을 접하면 어느 브랜드인지 안다. 슈퍼마켓 음료 판매대에서 빨간 캔을 보면 코카콜라가 떠오른다. 예전 삼성 로고가 파란 타원형이던 시절, 멀리서 파란 타원 하나만 봐도 삼성인 줄 알았다. 색은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보내는 가장 빠른 신호다. 로고를 읽을 새도 없이,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에, 색이 먼저 말한다. 브랜드에 있어서 색은 단순한 디자인 선택이 아니라, 때로는 법정까지 가는 치열한 전략의 산물이기도 하다.

황부영 브랜다임앤 파트너즈 대표 컨설턴트 - 현 부산 도시 브랜드 총괄 디렉터, 현 아시아 브랜드 프라이즈(ABP) 심사위원, 전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브랜드팀장

색이 상표가 되는 조건

법적으로 색을 상표로 등록하려면 ‘식별력(distinctiveness)’이 인정돼야 한다. 그 색을 보는 순간 소비자가 특정 브랜드를 떠올릴 만큼 인식에 깊이 각인돼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1995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Qualitex 판결을 통해 단색(單色)도 상표로 등록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했고, 이 판결은 패션·식품·통신 등 전 산업에 걸쳐 색 상표 등록 경쟁에 불을 지폈다. 가장 유명한 색 상표 중 하나가 티파니 블루(Tiffany Blue)다. 팬톤(Pantone) 1837번. 1837은 티파니가 창업한 해다. 이 색은 1998년 미국에서 공식 상표로 등록됐고, 이제 어떤 기업도 티파니 허락 없이 이 색을 브랜딩에 사용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색이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빅토리아시대에 청록색 계열은 행운과 번영을 상징하는 색으로 통했다. 창업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1845년 카탈로그 표지에 이 색을 얹은 것이 시작이었다. 특별한 계산 없이 이뤄진 선택이 150년 이상 일관된 사용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열망하는 색 중 하나가 됐다. 오늘날 티파니 블루 상자는 내용물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기대감과 설렘을 파는 물건이 됐다.

에르메스 오렌지의 탄생은 더 역설적이다. 이 색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색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 에르메스는 원래 쓰던 크림색 상자 재료를 구하지 못했다. 창고에 남아 있던 오렌지색 재료로 임시 대체한 것이 전부였다. 그 ‘차선책’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열망하는 색 중 하나가 됐다. 에르메스는 이후 이 색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에르메스 오렌지 박스’를 받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 경험이 된 것이다. 전략이 아닌 우연이 일관성이라는 시간의 힘을 만나 브랜드 자산이 된 사례다.

‘색 전쟁’이 소송으로 번지기도

색이 자산이 되면, 그것을 지키려는 싸움도 시작된다. 명품 하이힐 브랜드 크리스티앙 루부탱(Christian Louboutin)은 2008년 미국에서 빨간색 밑창을 트레이드마크로 등록했다. 하이힐 밑창에 새빨간 래커를 칠하는 것은 1992년 창업자 크리스티앙 루부탱이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이 강렬한 빨간색 밑창은 걸을 때마다 드러나며 착용자의 지위와 욕망을 은밀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됐고, 루부탱의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다.

2012년 루부탱은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빨간색 밑창 하이힐을 출시한 것을 상표권 침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색깔에도 소유권이 있나?’ 패션 업계가 술렁였다. 그러나 미국 제2 순회 항소법원 판결은 루부탱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대조(contrast)’가 있을 때에 한정한다는 것이다. 밑창의 빨간색이 신발 갑피(shoe upper) 색과 다를 경우에만 루부탱 상표권이 보호된다는 판결이었다. 신발 전체가 빨간색인 이브 생 로랑 제품은 침해가 아니라고 봤다. 색 자체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맥락에서 소비자가 특정 브랜드를 연상하는 경우에만 보호한다는 논리였다.

통신사의 색 전쟁은 더 노골적이다. 미국의 T-모바일은 마젠타(Magenta)를 상표로 등록하고, 경쟁사가 유사한 색조를 마케팅에 사용하면 곧바로 법적 경고를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의 한 통신사가 비슷한 분홍 계열을 광고에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소송까지 간 사례도 있다.

팬톤이라는 회사가 매년 ‘올해의 컬러’를 발표할 때 전 세계 디자인·마케팅 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색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 시장을 움직이는 신호가 됐다. 어떤 색이 유행하느냐에 따라 패션·인테리어·식품 포장까지 산업 전반이 흔들린다. 색의 권력이다.

색이 말하는 것, 색이 설계하는 것

색은 언어보다 빠르게 감정에 작용한다. 컬러 심리학 연구는 파란색이 신뢰와 안정감을, 빨간색이 긴박감과 열정을, 초록색이 자연과 건강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글로벌 금융기관이 유독 파란색을 선호하는 것도, 친환경 브랜드가 초록색을 택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소비자는 색을 통해 브랜드를 느끼고, 브랜드는 색을 통해 포지셔닝을 설계한다.

코카콜라의 레드는 100년 이상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 일관성이 ‘코카콜라 레드’라는 독립적인 자산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소비자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 이미지도 코카콜라 광고 캠페인이 대중화시켰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코카콜라 레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됐다. 1931년부터 코카콜라는 일러스트레이터 해든 선드블롬(Haddon Sundblom)을 기용해 산타클로스를 코카콜라 레드 옷차림으로 그리는 광고를 수십 년간 이어갔고, 이 이미지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산타클로스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법칙을 역이용해 차별화에 성공한 사례다. 보수적인 기존 업계의 색 관행에 맞서, 버진(Virgin)그룹은 창업 초기부터 빨간색을 브랜드 전반의 색으로 선택했다. 항공·통신·금융 등 진출하는 업종마다 경쟁사가 파란색·회색 계열로 신뢰를 강조할 때, 버진의 빨간색은 설명 없이도 ‘우리는 기존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업계의 색 문법을 알아야 그것을 깰 수 있다. 루부탱이 신발 밑창에 빨간색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발 밑창은 전통적으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이다. 거기에 강렬한 빨간색을 넣은 것은 ‘걸음마다 보이는 욕망’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낸 의도적 설계였다.

한국에서는 카카오의 노란색이 가장 성공적인 컬러 브랜딩 사례로 꼽힌다. 카카오는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 카카오모빌리티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때도 노란색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 결과 앱 아이콘 없이, 노란 ATM이나 노란 택시만 봐도 카카오가 떠오른다. 색이 브랜드를 대신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컬러 브랜딩의 완성이다.

보이지 않는 설계, 보이는 자산

“소비자는 제품이 아니라 기대를 산다”, 데이비드 오길비의 명언이다.

로고에 숨겨진 화살표와 미소처럼, 색에도 보이지 않는 설계가 있다. 티파니 블루 상자를 받는 순간 가슴이 뛰는 것, 에르메스 오렌지 박스를 한눈에 알아보는 것, 루부탱 빨간 밑창에서 욕망을 느끼는 것. 이 모든 반응은 수십 년간 쌓인 일관된 색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다. 오길비의 말처럼, 소비자가 그 상자를 열기도 전에 색이 먼저 기대를 판다. 소비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브랜드는 계산하고 설계하고 법으로 지킨다.

색을 선택하는 것은 취향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경쟁 브랜드와 어떻게 차별화될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일관되게 지켜낼 것인지의 전략적 판단이다. 에르메스가 전쟁통의 임시 방편 색을 80년 가까이 고수했고, 티파니가 창업 당시 청록색을 150년 넘게 유지했듯이. 색은 결정되는 순간보다 지켜지는 과정에서 가치가 쌓인다. 그렇게 색은 디자인에서 자산으로, 자산에서 브랜드 그 자체로 변한다.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마주치는 그 색이, 사실은 누군가의 가장 정교한 설계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인다. 브랜드 컬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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