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결혼해, 딴 여자와"…욕망 좇은 화가 그 허망한 결말 [화폭역정 1]

오현주 2026. 3. 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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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 불온한 인생 '에곤 실레'
날 세운 선에 욕망·불안·고독 담아
적나라한 표현은 포르노·외설 시비
'한 쌍' 초상화 그릴 만큼 애정 깊던
헌신적 연인 버리고 '유리한 결혼'
3년 만에 찾아든 비극은 못 막아내
스페인독감에 아내와 28년생 마감
에곤 실레의 ‘꽈리가 있는 자화상’(1912). 날을 잔뜩 세운 선과 선이 캔버스 속 남자를 더욱 날카롭게 빚어내고 있다. 노골적인 성적 욕망, 나체의 몸부림 등으로 유독 자화상을 많이 그린 실레의 대표작이다. 뒤틀리고 깡마른 육체를 만든 그 불안한 선이 실레를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주창자로 꼽게 한다.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 영향을 받았다. 장식적 에로티시즘, 구상적 왜곡을 접하며 가뜩이나 거침 없던 화면은 더욱 과감해졌다. 하지만 점차 불안·고독·본능 등 인간 내면의 감정에 몰입한 거칠고 적나라한 화풍으로 클림트와는 다른 결을 완성해 갔다. 목판에 오일·불투명안료, 32.2×39.8㎝. 레오폴트미술관(오스트리아 빈) 소장.
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화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나 결혼해. 물론 너와는 아니고. 하지만 매년 여름 너와 단둘이 여행을 갈 거야. 그건 약속해.”

1915년 2월 유달리 추웠던 날. 오스트리아 빈의 한 카페 아이히베르거에서 에곤 실레(1890∼1918)가 당구를 치며 발리 노이칠에게 말했다. 실레는 노이칠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고 노이칠은 그것을 천천히 읽었다. 실레가 건넨 종이에는 ‘매년 여름 나는 발리 노이칠과 여행을 갈 것이다’라는 계약의 문구와 서명이 있었다. 팽팽한 긴장의 공기 속에서 노이칠은 종이를 스르르 바닥으로 흘려보내고 말없이 뒤돌아 카페의 문을 나섰다. 그것이 실레와 노이칠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화가 실레는 이제 막 오스트리아에서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뒤를 잇는 젊은 천재로 명성이 굳어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고정적으로 수집하는 컬렉터와 후원자가 생겨났고, 빈의 중심가로 이사도 할 수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가난에서 겨우 헤어나 한숨 돌릴 수 있었던 그 순간, 4년간 함께 살며 살림을 도맡아 하고 무료로 모델로도 서야 했던 노이칠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이다. 실레는 외설죄로 감옥에 갇혔던 시기 옥바라지를 했던 노이칠을, 가장 어두운 시절을 함께 통과한 동지와도 같았던 노이칠을 성공의 문턱에서 ‘과거의 허물’처럼 벗어던졌다.

서로에게만 기대 있던 시절, 실레가 그린 ‘발리 노이칠의 초상’(1912)에는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과 붉은 머리칼, 흰 피부에 발그레한 청춘이 묻어나는 노이칠의 얼굴이 있다. 이 작품은 실레의 자화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꽈리가 있는 자화상’(1912)과 한 쌍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 속의 실레와 노이칠은 각각 22세, 18세였다.

‘꽈리가 있는 자화상’에서 실레는 의심이 가득한 삐딱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고개는 옆으로 틀고 눈동자만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은 자신감 넘치면서도 취약한, 꼿꼿하면서도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이중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같은 흰 배경에 그려진 ‘발리 노이칠의 초상’은 호기심 어린 푸른 눈빛과 웃을 듯 말 듯한 입매가 유독 눈길을 끈다. 마주 보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의 ‘발리 노이칠 초상’은 후에 ‘빈의 모나리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에곤 실레의 ‘발리 노이칠의 초상’(1912). 1911년부터 4년간 연인이던 18세의 발리 노이칠을 그렸다. 1915년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실레의 폭탄 선언으로 헤어질 때까지 노이칠은 모델로, 매니저로 실레에게 헌신했던 인물이다. 22세의 실레가 자신을 그린 ‘꽈리가 있는 자화상’과 같은 해에 같은 풍, 같은 크기로 제작됐다. 결별한 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두 작품은 결국 다시 조우해 짝꿍처럼 붙어다닌다. 다만 2차대전 직전 나치에게 약탈당하기도 했고, 2000년대 초반에는 미국에서 소유권 분쟁을 겪는 등 사연으로 보면 둘 중 더 험한 여정을 겪었다. 목판에 오일, 32.2×39.8㎝. 레오폴트미술관(오스트리아 빈) 소장.
“노이칠은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동지”

실레가 한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당시 실레와 노이칠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노이칠을 두고 실레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동지”라고 표현했고, 친구는 답장으로 “현명한 발리”의 안부를 물었다. 총명하면서도 인내심이 강한 노이칠은 변덕스러운 실레의 곁에서 작품 판매 가격을 협상하거나 전시 일정을 조율하는 등 사실상 매니저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실레에게는 끊임없이 외설 시비가 따라다녔다. 연이어 그려대는 에로틱한 드로잉들로 인해 ‘포르노 화가’라고 불렸고, 노이칠과 동거 중 미성년자 유괴 혐의를 받은 사건이 재판까지 가면서 ‘파렴치한’의 이미지를 떨어버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을 후원하는 열렬한 비평가와 컬렉터 덕분에, 또한 해외 전시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실레는 더 이상 ‘빈의 문제아’가 아닌 ‘클림트를 잇는 차세대 대가’로 확실한 변신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도덕한 예술가로 굳어진 이미지를 세탁하는 데는 결혼만한 선택이 없었다. 상대는 모델 직군의 노이칠보다 철도청 고위 공무원을 아버지로 둔 에디트 하름스가 제격이었다.

하름스를 발견한 실레는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구르던 의복을 벗어던지고 최고급 영국식 정장을 맞춰 차려입었다. 한 다발 가득 꽃을 손에 들고 하름스를 기다리다가 시내의 오페라극장에 공연을 보러 갔다. 하름스는 노이칠과 달리 위태로운 실레를 부르주아 사회로 입성시켜줄 안전한 입장권이었다. 얼마 뒤 실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난 결혼을 할 생각이야, 유리하게. 발리와는 아니야.” 유리한 결혼. 그것이 실레의 선택이었다.

결국 유달리 추웠던 그날, 실레는 당구대 앞에서 노이칠에게 매년 여름에 여행가는 것을 조건으로, 결혼은 다른 사람과 하지만 숨은 연인이 돼달라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이칠은 카페를 나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짐을 챙겨 집을 떠났고 실레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과 절연했다. 그후 노이칠은 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간호학교에 입학해 2년간 교육을 받고 종군간호사로 파견됐다. 1차대전의 포화가 집중됐던 달마티아(지금의 크로아티아)의 임시병원에서 노이칠은 헌신적으로 전상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노이칠은 성홍열에 걸렸고 1917년 성탄절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셋이었다.

부음을 들은 실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노이칠이 울며 매달린다거나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거나 하지 않고 신속히 떠나줘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한 시절 자신을 사람답게 돌봐준 노이칠에게 다시 애틋함을 느꼈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결혼 뒤 그린 ‘가족’…아내·아이 책임지는 가장 모습 표현

결혼 이후 실레는 화풍에서나 삶의 태도에서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화면 속에 신경질적이고 부러질 듯 날카로운 선들이 점차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졌으며, 평면적이고 앙상했던 인체 묘사는 훨씬 사실적이고 풍만한 양감을 가지게 됐다. 이 변화를 두고 세상과 화단은 상충하는 비평을 쏟아냈다. 성숙해졌다는 찬사와 매너리즘에 빠져 날카로움을 상실했다는 비난이다.

에곤 실레의 ‘가족’(1918). 20대 후반 한층 ‘무뎌진’ 붓끝과 감정선을 내보인 작품이다. 안정적인 삼각구도, 부드럽게 감아낸 색감이 이전 화풍과 크게 달라졌다. 결혼 뒤 그린 가족그림이나 실제와는 다르다. 뒤쪽 남자는 실레 자신이지만 가운데 여인은 아내 역할을 한 모델이다. 또 당시 아내는 임신 중이라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행복을 바란 가상의 가족그림이려니 여길 순 있겠지만 현실은 그림과 달랐다. 유럽을 휩쓴 스페인독감으로 바로 그해 임신 6개월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고 사흘 뒤 실레도 숨을 거두고 만다. 캔버스에 유채, 152.5×162.5㎝. 벨베데레궁전 미술관(오스트리아 빈) 소장.
작품 ‘가족’(1918)에서 보이는 안정된 삼각구도 속에서 실레는 아내와 아이를 책임지는 가장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 아내처럼 실레 앞에 앉아있는 여인은 뜻밖에 다른 모델이다. 누드로 나서는 ‘천박한 일’을 거부했던 아내 하름스의 뜻을 존중했던 것이다. 또한 하름스는 임신을 했을 뿐 그림 속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다. 실레는 곧 다가올 더한 행복을 기대하며 가상의 가족도를 그렸던 것이다. 빈의 주류사회에 편입돼 더 이상 가난에 쫓기지 않고 비난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실레는 이제 탄탄대로에 서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운명은 실레의 설계대로 흐르지 않았다. 1918년 가을,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스페인독감이 실레와 하름스를 덮쳤다. 임신 중이던 아내 하름스가 먼저 숨을 거뒀고, 사흘 뒤 실레 역시 스물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노이칠을 떨쳐내고 세운 견고한 부르주아의 성벽이었지만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계획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그것이 어찌 인생이겠는가. 실레는 ‘유리한 결혼’을 통해 안정을 구가하려 했지만 그의 탄탄대로는 그렇게 미완의 절벽에서 멈춰 섰다. 삶은 때로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마침표를 찍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위대한 예술이란 한 예술가의 흠 많은 인생조차 승화시키는 역설일지도 모르겠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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