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제관료

이정호 2026. 3. 6. 07:3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951년 9월 한국전쟁 통에 재무부 예산과장을 시작으로 1980년 5월까지 경제부총리를 지낸 한국의 경제관료이자 숭실대와 아주대 총장을 지낸 이한빈은 말년(1996년)에 회고록 '일하며 생각하며'를 남겼다.

이한빈은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 일찍 기독교에 입신해 1938년 캐나다 선교회가 세운 함흥 영생중학교에 들어가 5년간 영어를 배운 뒤 1943년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에 입학한다.

해방 이후 70년간 기독교와 영어만 유창하면 출세길이 자동으로 열렸다. 이한빈도 그런 류였다. 해방 후 월남한 그는 1946년 9월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해 안호상 교수 밑에서 배웠다. 은사 안호상이 1948년 8월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 되자 따라가 1년간 장관 비서실에서 국제교류 업무를 맡았다. 1년 뒤 그는 국비 유학생에 뽑혀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MBA)에 유학 갔다.

영문과생 이한빈이 하버드 MBA에 간 사연은 이랬다. 당시 주한 미 대사관 젊은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문교부에 드나들면서 장관 비서실에 있던 이한빈을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 MBA에 직접 편지까지 써 추천해줬다. 헨더슨은 1963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에서 수집한 도자기 150여점과 불화, 불상, 서예 작품을 가져갔다. 훗날 문화재 밀반출로 잠시 문제가 됐지만, 미국에 잘 보이려는 한국 고위관료들이 뇌물로 바쳤다.(한겨레 2011년 3월8일, '미국에 선물로 바친 문화재') 그땐 그랬다.

이한빈은 1951~80년 줄곧 미국과 경제 원조교섭에 나섰다. 1954년 이승만-아이젠하워 대통령 정상회담, 1957년 김현철 재무장관, 1960년 10월 제2공화국 김영선 재무장관 등 수없이 방미 수행원으로 미국 갔다. 1961년 5월 미국 출장 땐 5·16 쿠데타 소식에 중도 귀국했다.

그래도 그는 군사정권과 체질이 안 맞았다. 1961년 12월 주 제네바 공사를 시작으로 스위스 대사, 오스트리아 대사로 떠돌다 1965년 사표를 내고 공무원 생활을 끝냈다. 이후 이한빈은 서울대 행정대학원장과 숭전대(숭실대) 총장, 아주공과대(아주대) 학장 등 교육자로 변신했다. 60년대 말 박정희는 그에게 "이 사람(이한빈)은 우리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정부에 안 들어오려는 사람"이라고 농담했다.

그랬던 그가 다시 공무원에 돌아온 건 1979년 12월 최규하 대통령 때다. 돌아온 이한빈은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 과도정부 위기관리를 맡았다. 그때도 그가 제일 먼저 한 건 1980년 2월 미국 방문해 박동선 사건 이후 추락한 한국 이미지 개선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는 독재와 군사정권에 부역한 낡은 행정관료로 끝났을 거다. 그는 회고록 말미에 '인생은 참회'라는 글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

"1960년 3월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 때 나는 예산국장이었다. 직접은 아니지만, 자유당 강경파가 선거용으로 강요한 농어촌사업비, 공무원연금·군인연금제도 창안 등 정책사업비를 예산에 반영하는 등 정부 흐름에 참여했다. 시대가 그랬으니 나는 직업공무원으로 대세에 순응했을 뿐이라고 하겠지만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첫 번째 뉘우침이다. 두 번째 뉘우침은 80년 초 과도정부 내각에 참여해 그만 둘 때다. 80년 5월17일 야간 국무회의에서 계엄령을 전국 확대할 때 나는 국무회의 결의에 참가한 걸 여생에 커다란 뉘우침으로 남았다. 국무위원인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사실상 쿠데타를 당했다. 여생을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았다. 나는 이 뉘우침에 대한 참회로 90년대 공명선거운동에 적극 몸을 던졌다"고 썼다.

실제 이한빈은 1991~93년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공동대표로 1992년 양심선언한 이지문 중위를 적극 엄호하는 등 사회운동가로 나섰다.

그는 윤석열 정부에서 한덕수·최상목·추경호 같은 경제관료가 보여준 모습과 많이 달랐다.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Copyright © Copyright © 2026 매일노동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