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조력자살에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안락사에 관한 ‘사회적 대화’ ③]

송병기 2026. 3. 6. 07:0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의사조력자살이 허용된 국가는 법적 기준을 둔다. 사회경제적 비용까지 감안하면, ‘선택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스위스 슈베르첸바흐 마을에 있는 의사조력자살 지원 단체 ‘디그니타스’의 건물 입구. ⓒEPA

2025년 11월 이른바 ‘스위스 안락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40대 김씨를 처음 만났다. 휴일임에도 반듯한 정장을 입고 온 그에게 눈길이 갔다. 말투와 제스처에서도 단정함이 느껴졌다. 그는 대형 법무법인에서 15년간 사무직으로 일했지만, 2년 전 퇴사한 뒤 난소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 간병에 전념하고 있었다. 고령의 아버지는 교대근무를 하고 있었고, 여동생은 어린 자녀들로 인해 간병을 맡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간병인을 고용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하루 14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웠고, 어머니의 몸을 낯선 이에게 맡기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었고 생계는 남편이 책임지고 있었다. 여기에 장녀라는 가족 내 위치까지 더해지면서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그의 몫이 되었다.

김씨는 어머니를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돌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집에 머물기 힘든 이유로 증상 조절의 한계, 거동의 어려움, 그리고 위급한 상황 발생 시 즉각 대응할 사람이나 시스템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암 전문 요양병원을 표방하는 이곳의 병원비는 한 달에 약 800만원에 달한다. 그는 병원비에 꼭 필요해 보이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항목을 빼기는 쉽지 않다. 병원은 비급여 항목을 주요 수익원으로 삼고 있고, 암 환자는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가 여러 개의 사보험에 가입해 있어 “다행히도” 전체 병원비의 약 20%만 부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어머니를 간병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김씨는 정기검진 과정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도” 초기 단계여서 수술과 항암 치료의 결과가 좋았고, 현재는 정기적인 추적 관찰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진단 이전부터 우울증을 겪으면서 정신과 진료를 받아왔다고 밝혔다. 김씨는 간병을 하며 “앞으로 남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혹독할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고 했다. 자신은 어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죽고 싶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김씨는 중국과 멕시코에서 거래된다고 알려진 ‘안락사 약’에 대한 정보도 찾아봤다고 했다. 그러나 해당 약물에 대한 정보는 투명하지 않았다. 약을 먹었음에도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지 못할 경우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생할 위험이 컸다. 결국 스위스로 가는 선택이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그가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된 이유였다.

두 달 후, 인터뷰를 위해 김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결 밝아 보였다. “이런 말을 하기가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솔직히 홀가분한 마음”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서, 또 2년간의 간병이 끝나서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스위스 안락사’ 모임 이후 어머니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대학병원 외래 진료에서 담당 교수는 호스피스를 권했다. 교수의 권유를 들은 후 완화의료 상담실을 찾아 호스피스 병동 전원을 알아보았지만, 당장 입원할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김씨는 호스피스로 가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다고 했다.

한 병원에서 우선 일반 병실에 입원한 뒤 자리가 나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그곳으로 어머니를 옮겼다. 전원 이후 어머니의 통증은 극심해졌다. 의료진이 여러 방법을 시도했음에도 어머니의 통증은 완화되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나자 섬망 증상까지 나타났고,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듯 계속 몸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켜보며 마약성 진통제 투여 버튼을 재빨리 누르는 것뿐이었다.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사별 가족 당사자가 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에 참석해 눈물 흘리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3000만원짜리 죽음

김씨는 지난 2년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번 모임 때보다 안락사에 대해 더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는 3000만원 정도 비용이 든다. 그는 생의 말기에 겪게 될 고통을 생각하면 이 비용이 그렇게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에게 스위스행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최후의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의 삶을 버티게 하는 위로와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김씨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죽음의 지형도, 혹은 지옥도처럼 펼쳐졌다. 그가 묘사한 현실에서 ‘생명은 신성하기에 환자 돌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형벌처럼 다가왔다. 생의 끝자락은 다행과 불행의 길고 지루한 줄다리기처럼 느껴졌다. 환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안락사는 탈출구처럼 보였다. 스위스로 가겠다는 그의 엄숙한 선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씨의 경험은 생의 끝자락에서 한국의 의료·돌봄 체계가 철저히 실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사회경제적 배경을 놓고 보면 그는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로 복잡한 의료 정보를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 대기업 재직 경험과 일정한 경제력, 가족들의 협조 속에서 2년간 간병에 전념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개인의 능력으로 의료·돌봄 체계의 실패를 나름대로 만회한 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꿔 말해, 그보다 열악한 삶의 조건에 놓인 이들에게 생의 끝자락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안락사를 ‘죽을 권리’나 ‘환자의 선택권’ 보장이란 말로 이해하고 지지하기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많다. 그렇다면 서구 사회의 상황은 어떨까. 미국과 스위스 사례를 통해 한국의 안락사 논쟁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2026년 2월 기준으로 미국에서는 워싱턴 DC와 13개 주에서만 의사조력자살이 허용되고 있다. 먼저 개념을 상기하면, 안락사는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으로, 본인의 요청에 따른 의료적 조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이다. 흔히 안락사로 통칭하지만, 실제로는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안락사(euthanasia)’와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환자 스스로 투여·섭취하는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로 나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행위의 주체, 즉 누가 약물을 투여하는가에 있다. 인류학자 애니타 해닉에 따르면, 미국이 의사조력자살만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환자의 자기결정-자율성이 ‘약물을 스스로 입에 넣고 소화하는 행위’를 통해 가시화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죽음의 선택과 그 과정에 대한 책임을 환자 개인에게 귀속시키려는 미국 사회의 규범을 보여준다.

안락사를 개인의 선택으로 이해할 경우, 그 선택에 따른 책임 역시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관련 법이 있고, 굳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그 선택을 실행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법적 기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마다 세부 내용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 구조는 대체로 유사하다.

버몬트주의 경우 의사조력자살은 ‘생애 말기 환자의 선택에 관한 법(Patient Choice at End of Life Law-Act 39)’에 근거해 이뤄진다. 그 대상은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고, 6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진단을 받은 만 18세 이상의 말기 환자이다. 외국인은 신청할 수 없다. 의사조력자살 과정에는 의사 두 명이 참여해야 한다. 즉, 처방전을 작성할 의사와 환자의 자격 기준을 확인하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 또 그 시행을 위해서는 환자가 요청서에 서명할 당시 문서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강압이나 부당한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지를 만 18세 이상의 증인 두 명 앞에서 확인받아야 한다. 이 증인들은 환자와 특수관계에 있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제도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을까. 가령 말기 질환을 앓고 있어야 한다는 요건은 이 제도가 예후 판단이 비교적 용이한 암 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만든다. 버몬트주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한 인류학자 마라 부크바인더에 따르면, 의사의 치료 중심 규범에 비추어볼 때 윤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환자가 이 제도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이를테면 호스피스·완화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임종이 임박한 암 환자 정도가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의사결정 능력이 있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조건은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환자군이 엄격하게 제한됨을 보여준다.

요컨대 미국에서 의사조력자살을 하려면 죽음이 임박해 있으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신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의사에게 가서 처방전을 받아야 하고, 약사를 통해 약을 수령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약을 살 돈도 두둑이 있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할 집이 있어야 하고, 시신을 수습할 사람도 미리 섭외되어야 한다. 팔에 힘이 부족하더라도 어떻게든 약이 든 컵을 들어야 하고, 삼킴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스스로 약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환자는 관련 법·의학 정보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자신의 선택을 먼저 의사에게 밝혀야 한다. 이 새로운 죽음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의사와 대화하며 그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환자가 만난 의사가 의사조력자살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면, 환자는 처방전을 써줄 다른 의사를 찾아 나서야 한다. 물론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환자에게 치명적 약물을 처방할 의사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모든 허들을 넘어 실제로 의사조력자살에 이르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버몬트주에서 전체 사망자 중 의사조력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연평균 약 1% 내외에 불과하다(2023~2025년 기준). 1997년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한 오리건주 역시 현재까지 그 비율이 연평균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2016년에 제도를 도입한 캘리포니아주 또한 사정은 비슷하다. 이러한 낮은 이용률은 앞서 살펴본 여러 요건을 현실적으로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의사조력자살에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의료진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갖추고 있고, 법률과 의학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건강상태를 면밀히 관리하면서,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점에 약을 스스로 복용할 수 있는, 이른바 ‘자율적인 개인’이다.

마라 부크바인더는 미국의 의사조력자살 제도가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형식적으로는 ‘선택할 권리’가 모두에게 주어져 있지만, 실제로 그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집단이 의사조력자살을 더 강하게 선호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제도 자체가 기존 사회적 불평등을 반영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미국에서는 ‘의사조력자살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민간병원도 등장했는데, 이들 기관은 복잡한 절차를 완화한다는 평가와 함께 죽음을 수익화한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사례는 안락사 제도가 기존 사회적 불평등과 결합할 때, 개인의 선택과 제도의 작동 방식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025년 6월13일 영국 런던에서 안락사 법안을 둘러싸고 찬반 의견이 나뉜 시민들이 팻말을 들고 있다. ⓒEPA

스위스 전체 사망자 중 의사조력자살은 2%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가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에이미 블룸의 에세이 〈사랑을 담아〉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저자는 남편 브라이언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한다. 그가 오랫동안 참여해온 독서모임의 일정과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글을 읽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결국 부부는 신경외과를 찾는다. 브라이언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그로부터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떠나고 싶어. 무릎 꿇고 살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블룸과 브라이언은 미국의 제도를 이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한다. 결국 브라이언은 스위스의 의사조력자살 지원 단체 ‘디그니타스’에 등록하고, 일련의 절차를 밟아 취리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스위스는 미국처럼 의사조력자살만 허용하고 있다. 세간의 상식과 달리 스위스에는 안락사에 관한 법이 없다. 다만, 스위스 형법은 ‘이기적인 동기에 의한 자살을 선동하거나 돕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 형법을 근거로 이타적 동기에 의한 의사조력자살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스위스 안락사’는 자살과 자살 방조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이기적인 동기만 없으면 자살 방조를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명적 약물의 직접 투여 같은 적극적 행위는 불법이지만, 의사가 치명적 약물을 처방하는 것은 합법이다.

스위스에서 의사조력자살은 ‘디그니타스’와 같은 민간단체를 통해 이뤄진다. 자신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길 희망하는 사람은 그러한 단체가 설정한 기준과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단체에 소속되거나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극소수의 행정 직원, 법률가, 의사, 자원봉사자 등이 신청자의 의료기록 및 진단서를 까다롭게 검토한다. 심층 인터뷰도 여러 차례 진행한다. 물론 이 ‘서비스’는 공짜가 아니다. 단체에 납부해야 하는 비용을 비롯해 장례 비용, 비즈니스 항공권, 호텔 체류비 등 모든 비용을 신청자가 부담해야 한다. 환자와 동행자 한 명이 취리히에 함께 간다고 가정할 경우, 총비용은 대략 3000만원에 이른다.

더 중요한 것은 스위스의 의사조력자살 역시 엄격한 선별 기준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청자는 ‘온전한 판단력(sound judgement)’과 ‘최소한의 신체 이동성(physical mobility)’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가령 치료할 수 없는 질병으로 장기간 고통을 받아온 환자라면 우울증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울증이 있거나 그와 관련된 의료 기록이 있을 경우 신청자는 온전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블룸과 브라이언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 “신경외과에서 검사한 MRI 결과지가 디그니타스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어, 나는 그 결과를 반박해줄 정신과나 신경외과 의사를 찾아 헤매게 된다. 결과지에는 브라이언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나와 있으며, 이게 진짜라면 디그니타스에서는 절대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의사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게다가 의사조력자살 신청자가 취리히로 이동할 수 없거나 약물이 담긴 물컵을 직접 들어 마시기 어려운 상태라면 최소한의 신체 이동성이 없다고 판단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스위스의 의사조력자살 신청자 또한 여러 절차를 통해 선별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브라이언의 ‘존엄한 죽음’은 미국 의료진 및 스위스 기관의 협력, 취리히로 갈 수 있는 환자의 체력, 가족의 추진력을 ‘사랑에 담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미국과 스위스의 상황을 비슷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언젠가 본 취리히의 한 노인요양시설 의사가 생각난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의사조력자살을 반대하지 않았다. 삶처럼 죽음도 한 사람의 표현이고, 삶이 그러하듯이 죽음의 모습도 다양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누군가 의사조력자살을 원하면, 그와 찬찬히 대화할 수 있다고 했다. 의사조력자살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스위스 전체 사망자 중 의사조력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은 연평균 2% 내외이다. 왜 대다수 스위스 사람들은 그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 의사는 집이나 상급병원을 생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하는 이가 있듯이, 자신이 만나는 노인들은 요양시설에서 평온하게 지내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느긋함’은 한국의 안락사 논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안락사를 합법화하기만 하면 우리는 잘 죽을 수 있을까.


■ 참고 문헌

〈내가 죽는 날〉(애니타 해닉, 신소희 옮김, 2025, 수오서재)
〈사랑을 담아〉(에이미 블룸, 신혜빈 옮김, 2023, 문학동네)
〈scripting Death: Stories of Assisted Dying in America〉(Mara Buchbinder, 202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송병기 (의료인류학자) editor@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